#의사 제자가 선생님께

선생님, 신일고(信一高) 9회 졸업생 최영득입니다. 2000년 여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제 방으로 들어오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최 박사, 나 알겠어?"라고 하셨지요. 25년 전 제 학창시절과 하나 변함없는, 박력있는 모습이셨지요.

소변에서 피(血)가 나온다는 말에 놀랐지만 개복(開腹)한 뒤 더 놀랐습니다. 방광 전체가 암(癌)으로 뒤덮여 있었거든요. 메스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여서 그냥 배를 닫고 말았습니다. 의사를 하면서 이런 경우는 두 번뿐이었습니다.

외래(外來)나 입원 때 선생님을 뵙는 게 괴로웠습니다. "왜 하필 내게 오셨나"하는 자괴감에 시달리기도 했지요. 항암 치료 후 옆구리로 오줌 빼는 관(管)을 제거하면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지요. "이제 하실 일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은 3차례 수술했습니다. 항암치료도 일곱 달 동안 받으셨고요. 한마디로 말기암 환자인데, 통계적으로 그런 분들은 1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그것도 최대로 잡아서요. 그런데 그런데…, 저도 상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작곡가 스승이 제자에게

최 박사, 그때 내가 한 말 기억나? 할 일이 있으니 6개월만 더 살게 해달라고. 내가 성경(聖經)을 찬송가로 만들고 있다고, 그걸 완성할 때까지만 목숨을 부지시켜 달라고. 내 바람이었지만 자네에겐 얼마나 큰 부담이 되었을까.

항암제는 참 독하더군. 머리가 한꺼번에 다 빠져 팔자(八字)에 없는 대머리가 됐으니. 후유증은 얼마나 컸는가. 항암주사를 맞는 동안 신부전증(腎不全症)을 앓아 얼굴이 퉁퉁 붓기까지 했지. 콩팥에 호스까지 꽂고 다니는 게 참….

신부전증을 이겨나고 내니 이번에 또 결핵성 늑막염까지 찾아오더군. 설상가상(雪上加霜)은 바로 그럴 때 쓰는 말인 모양이야. 그때마다 난 자네에게 말했어. "하나님이 날 인도해주시겠지?" "찬송가 완성은 할 수 있겠지"라고.

어언 10년이 지났네. 인간의 입으로 제 몸을 향해 자신있게 완쾌(完快)라고 말할 순 없겠지. 하지만 적어도 방광경이나 CT, 그보다 더 정밀한 검진으로도 내 몸속의 암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건 역사(役事)일세.

꼬부랑할머니

꼬부랑할머니가 꼬부랑고갯길을
꼬부랑 꼬부랑 넘어가고 있네
꼬부랑 꼬부랑 꼬부랑 꼬부랑
고개는 열두고개 고개를 고개를 넘어간다
‐
꼬부랑강아지가 그 엿 좀 맛보려고
입맛을 다시다가 예끼놈 맞았네
꼬부랑 깽깽깽 꼬부랑 깽깽깽
고개는 열두고개 고개를 고개를 넘어간다

수박 한 덩이

작곡가 한태근(韓泰根·83)은 서울 수유6동 연립주택 2층에 살고 있었다. 20평 집은 여자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인 것 같았다. 식탁 위엔 수박 한 덩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노인은 객(客)을 위해 뙤약볕 맞으며 그걸 들고왔다고 했다.

―선생님의 신(神)이 기적을 만든 겁니까.

"전 그리 생각하지요. 몸에 이상(異常)을 느껴 동문회 간사에게 '제자 중 비뇨기과의사가 있느냐'고 물었어요. 제일 먼저 연락된 곳이 세브란스였고 두 번째가 삼성의료원에 있는 제자였습니다."

―세브란스에 간 게 무슨 의미가.

"어찌 보면 운명이지요. 제가 연대(延大) 출신이고, 어머니가 제중원 간호사 출신이셨으니."

―암 판정을 받았을 때 놀랐습니까.

"최 박사가 그랬어요. '선생님 (암이) 꽉 찼어요. 있는 대로 긁어냈지만 방광을 들어내야 할 것 같아요'라고. 놀라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하시는가보다 하는 정도로만 생각됐어요."

―종교를 가지면 다 그렇게 초연하게 되는 겁니까.

"1965년부터 성경 구절 그대로 찬송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왜 찬송가는 성경을 축약하거나 변형시키잖아요. 전 성경 구절에 일절 손을 대지 않고 작곡을 했습니다. 입원 전까지 만들어 놓은 게 55곡이었어요. 암이란 소릴 들었을 때 '아! 다 못 만들고 가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진짜 성경 구절대로 찬송가를 만들었나요.

"600곡쯤 만들었는데 300곡을 골라 책을 만들었지요. 구약에서 140곡, 신약에서 160곡. 보여 드릴까? 여기 이거. '성구(聖句)찬송가 300'이라고 2006년 7월 24일에 딱 2000부 찍었어요. 지금은 서점에서 볼 수 없을 겁니다."

―어디 볼까요? 흠~시작이 진짜 창세기부터네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로 이어지고요.

"예닮교회 김호석 목사께서 그러시더군요. 아마 이런 찬송가는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유일할 거라고."

―그런 귀중한 찬송집을 왜 2000권만 찍고 말았나요.

"이 책을 낸 데는 사연이 있어요. 문 선생, 혹시 '꼬부랑할머니'라는 노래 아시나?"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 꼬부랑 꼬부랑 넘어가고있네 꼬부랑 꼬부랑, 그 노래 아닌가요?

"그게 제가 만든 노랩니다. 50년도 더 됐지요. 성구 찬송가를 완성했을 즈음, SK텔레콤에서 연락이 왔어요. 휴대폰에 그 노랠 사용하고 싶다고. 전 '한 20만원쯤 주겠거니'하고 생각했어요."

―얼마를 주던가요.

"700만원을 받았습니다. 전 저작권협회에도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래로 돈 받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 돈을 '성구찬송가 300'이란 책 출판하는 데 썼어요. 사람 사는 게 참 묘해서, 다시 700만원이 생기는 겁니다."

―예수가 자꾸 먹을 것을 만들어내는 이야기 같습니다.

"제자들이 출판기념회 하는 데 찾아와 얼마씩 놓고 간 게 다시 700만원이나 됐어요. 처음엔 그걸로 '성구찬송가 300'을 CD로 내볼까 생각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군요. 한 곡당 1분만 잡아도 300곡이니 5시간 분량이 되잖아요."

―5시간 분량이면 CD로 다섯 장은 돼야겠네요.

"그래서 미루다 미루다 7월 초에 '찬양치유법'이란 책을 내게 된 겁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삶은 기이한 인연의 연속이지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

북만주(北滿州)

한태근의 선친 한춘옥(韓春玉)은 경남 밀양의 거부(巨富)였다. '밀양 남천강물이 말랐으면 말랐지 한씨 집 돈은 마르지 않을 것'이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한태근은 그 아버지의 8남매 중 막내다. 그런데 그 돈은 다 어디로 간 걸까.

―그런데 사모님은 어디….

"아내(김정애·金貞愛·77)가 7년 전에 파킨슨씨 병을 앓았어요. 잘 치료하고 있었는데 그만 작년 4월에 집에서 옷 갈아입다 넘어져 대퇴골이 골절되고 말았어요."

―저런.

"올 4월엔 뇌경색이 돼 반신불수가 됐어요. 집 근처 국립재활원에 있어요. 마흔 넘어 아직 미혼인 딸이 있는데 그 아이와 제가 돌보고 있지요."

―어휴, 그럼 하나님이 선생님을 도운 게 아니라 사모님이 선생님 병구완하다 그리 되신 거네요.

"아마 그랬을 거예요. 절 살리려 얼마나 고생했겠어요. 제가 나으니 이젠 아내가…. 제가 아플 땐 별걱정이 되지 않았는데 집사람이 저러니 참 그래요. 아내는 고향에서 교회 다닐 때부터 알았어요. 제가 여동생이 없어 아주 귀여워해줬거든요. 연극 때 주연도 시켜줬고."

―원래 갑부 집안 자제였지요.

"영화 '밀양(密陽)' 봤습니까? 거기 남부제일교회라고 나오지요? 원래 이름이 밀양역전교회입니다. 아버님이 세운 교횝니다. 일제시대 조선 팔도 명사들이 모여 민립(民立)대학 설립 논의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영남대표로 나간 분이 선친입니다."

―그리 돈 많은 선친을 두고 왜 이리 사십니까.

"(책장에서 '어느 한씨 가문의 독립운동 비화'라는 책을 꺼내오며) 집안에 독립투사가 많아요. 한봉근 선생은 김원봉(金元鳳)이 만든 의열단 부단장으로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받으셨고 한봉인 선생은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을 받았어요."

―그럼 선친께서도?

"아버지는 일본을 오가며 미곡상(米穀商)으로 돈을 버셨는데 부산경찰서 폭파사건에 연루된 겁니다. 폭탄을 농작물에 넣어서 수입해오신 겁니다. 그 일로 붙잡혀 대구에서 재판받고 옥고(獄苦)를 치르다 병보석을 나왔어요."

―병보석이면 역시 돈의 힘인가요.

"일본 육사 출신으로 사단장을 지낸 김두영 장군이라고 계십니다. 대만 장개석 총통과 일본 육사 동기인데 비록 일본군에 있었지만 민족의식이 남다른 분이었어요. 그분이 제 모친의 먼 할아버지뻘입니다. 그분이 보증을 서줘 풀려난 후 모든 재산을 정리해 만주로 갔습니다."

―그때 한 선생도?

"8살 때 만주로 갔어요. 북(北) 만주 목단강성 영안(寧安)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영안은 우리 독립운동사와 관계가 깊습니다. 이범석 장군, 김좌진 장군의 기지가 있었고 의열단이 창단된 곳도 거깁니다."

―그곳도 일본의 세력이 강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일본인 교사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제국주의에 회의적인, 지금으로 치면 약간 삐딱한 교사들이 많았어요. 일본 천황에게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거나, 일본 역사를 비판하고 '10대에 문학에 미치지 않으면 바보'라는 말을 하던 분들이었어요. 아버진 거기서 막대한 땅을 사 가난한 사람들이 경작할 수 있도록 했어요."

―만주에서 10년 사셨지요.

"목단강 중학이라고, 지금의 중·고교(中高校)를 합친 학교를 다니다 해방 직후 한 달 동안 걸어서 의정부까지 왔어요. 거기 오니 열차가 있어 그걸 얻어타고 밀양으로 돌아왔지요. 아버진 일본이 패망하기 전 '일본 놈들이 곧 망한다'는 말을 남기고 먼저 귀국하셨고요."

―그럼 그 많은 땅은?

"다 남겨놓고 왔지요. 아버지가 제 땅도 사놓았어요, 북만주에. 절 데리고 나가 '저쪽 산부터 저기까지가 네 땅이다'라고 하셨는데 다 소용없게 됐지요. 문서(文書)가 있긴 하지만."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날 스러져 간 젊은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진달래’

염쾌석과 윤이상

노인의 이야기가 투병(鬪病)에서 만주시절을 거쳐 노래로 이어졌다. 음악 이야기가 나오자 생기가 살아났다. 나지막이 자기 곡을 흥얼거리더니 몸까지 덩실댔다.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예술이 노인을 춤추게 했다.

―독립운동한 분들 자손들은 어렵게 산다지만, 그 땅이 참 아깝습니까.

"인생에 좌표가 된 분이 두 분입니다. 그 중 한 분을 만주에서 만났어요. 강원룡(姜元龍) 목사님의 외삼촌 염쾌석 선생이란 분인데, 영안국민학교 1학년 때 제 담임이었어요. 절 참 귀여워해주셨어요. 벌써 그 시절 3H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으니까요."

―3H가 뭔가요.

"머리(Head), 손(Hand), 열성(Hard)이 있어야 한다고, 그게 없어 우리나라가 망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분은 해방 후 북한에서 교회를 운영하다 순교(殉敎)했어요.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와 인민재판에 회부했다고 들었어요. 전 그런 분을 만난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그럼 또 한 분은?

"만주에서 돌아온 뒤 밀양농고에 들어갔어요. 학교를 마친 뒤엔 부산진국민학교에서 2년 동안 교사를 했습니다. 당시엔 고교 졸업장만으로도 할 수 있었어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음악활동을 했는데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잖아요. 그때 윤이상(尹伊桑)씨가 부산사범학교 음악선생으로 계셨는데 야간 음악교원 양성소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윤 선생은 폐가 안 좋아 결혼도 못한 노총각이었습니다."

―음악을 윤이상에게 배운 건가요.

"전력을 압록강 수풍(水豊)발전소에서 송전해주던 시절이었습니다. 툭하면 정전(停電)이 되기 일쑤였어요. 갑자기 컴컴해지면 윤 선생은 피아노를 치면서 청음(聽音)을 시키곤 했지요. 제가 음감(音感)이 꽤 민감한 편이었어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남들이 화성악을 할 때 전 대위법으로 풀곤 했어요. 조금 앞서 나갔다는 뜻입니다. 그럼 윤 선생은 '이 놈의 새끼, 안 가르쳐 준 걸로 풀고 있다'고 핀잔을 주면서도 절 굉장히 아껴주셨어요. 제가 작곡한 습작(習作)도 봐주곤 하셨지요."

―칭찬받았나요.

"찬송가 스타일로 만든 악보(樂譜)를 보면 휙 던지며 '한국사람이 한국음악을 만들어야지'라며 창피를 주곤 했지만 자상하게 해주셨어요. 나중에 동백림(東伯林)사건에 연루되긴 했지만 전 그분이 좌익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2년간 선생님으로 있다가 연대 신학과에 진학했지요.

"윤이상 선생은 음대 진학을 강력히 권유했어요. 당시 제 꿈은 슈바이처처럼 되는 거였어요. 일단 목사가 된 후 음악도 배우고 나중에 의학(醫學)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하진 못했지만."

―작곡한 리스트를 보면 참 장르가 다양합니다, '꼬부랑할머니'는 어떻게.

"어머니가 어릴 때 업어주면서 칭얼거릴 때면 꼬부랑할머니 이야길 해주셨지요. 막내지만 어머닐 제 집에서 17년간 모셨어요. 어느 날 보니 제게 꼬부랑할머니 이야길 들려주던 어머니가 꼬부랑할머니가 된 거예요. 어릴 적 들은 얘길 노래로 만들어보자 하고 시작한 겁니다."

―그 동요는 지금도 어린이들이 부르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선생이 자기가 만든 노래를 부르라고 강요할 순 없잖아요. 주로 교사 야유회갈 때 불렀는데 그게 퍼진 건 전석환이라고 YMCA에서 레크리에이션 강사하던 분이 알려서 확 퍼진 겁니다."

―그렇게 재미있는 동요를 만들던 분이 운동권 가요 '진달래'를 만들었다니.

"하하! '진달래'는 원래 운동권을 생각하고 만든 게 아닙니다. 청마(靑馬) 유치환 선생이 마흔 살 전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여류시인 이영도와 5000여통의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이영도 시인의 오빠가 저 유명한 이호우 시인인데, 청마가 보낸 편지는 연시(戀詩) 수준이었지요. '진달래'는 이영도 시인 작품입니다."

―그런 사연이 있습니까.

"당시 이영도 시인은 통영여중에서 윤이상 선생과 함께 교직생활을 하고 있었고 제 누님의 친구이기도 해요. 강원룡 목사께서 시곡(詩曲)동인회란 모임을 만들었어요.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때 제가 노래로 만든 '진달래'를 강 목사께서 듣더니 '자네가 만든 게 제일 낫다'고 했습니다."

운동권

한태근은 과천 개척교회 목사로 지내다 환일고 전신(前身)인 균명고와 신일고 음악교사가 됐다. 거기서 작곡한 게 동요 '꼬부랑 할머니'와 운동권 가요의 원조인 '진달래'다. 윤동주의 서시(序詩)를 노래로 만든 것도 그다.

―그런데 어쩌다 그게 운동권 가요가 됐습니까.

"제가 '진달래'를 만든 게 1973년인데 4·19혁명의 상징처럼 돼버린 겁니다. 대학생들뿐 아니라 구로공단 노동자들까지 불렀으니까요. 그 때문에 금지곡이 됐습니다. 당시 '진달래'가 수록된 낡은 노래집엔 김민기의 '아침이슬' '친구'도 들어 있었어요."

―한 좌파신문의 1991년 보도를 보니 '핍박 속 매년 (4·19) 묘지 참배'라는 제목이 보이던데, 정말 그 노래 때문에 탄압받았습니까.

"진달래가 이북 국화(國花)니 뭐니 하는 소리까지 나오긴 했지요. 대놓고 괴롭힘을 당하진 않았지만 불안하긴 했어요. 그렇다고 '핍박'당한 건 아니었어요. 생전 처음 그 신문사에 찾아가 항의했어요."

―그랬더니 뭐라던가요.

"기자가 무척 미안해하더군요."

―그 노랜 요즘도 불립니다.

"안치환이란 가수가 얼마 전 자기가 취입해보겠다고 연락을 해왔어요. 괜찮다고 해놓고 보니 그의 노래를 들어보니 약간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어요. 반미색(反美色) 때문에요."

―뭘 들으셨기에.

"그의 CD를 들어봤지요. 그래서 전화를 걸었어요. '그런 (반미적) 노래와 함께하려면 부르지 말라'고요. (신일동문들이 만든 웹사이트엔 그가 안치환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글이 올라와 있다. '어려운 시절 목숨 걸고 독립운동하고 군사독재에 항거하던 것과 좋은 시절 온 후 노동운동이랍시고 선동하는 것은 다르다고 야단쳤다.')"

―그랬더니 뭐라던가요?

"각서까지 보내왔어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라고요. 그래서 승낙했습니다."

―그런 노래는 작곡하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당시 살던 집 침대 위에 올라서 창문 밖을 내다보는데 4·19묘지로 햇살이 확 비치는 거예요. 그로부터 순식간에 작곡했어요. 정말 순식간에요."

―윤동주의 서시는 또 어떻게.

"만주에 은진학교라는 명문학교가 있었어요. 거기 입학시험에 합격해놓고 서울에 와 경기고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어요. 조선총독부 교과서와 만주 정부의 교과서가 달랐습니다. 낙방 후 만주로 가보니 은진학교 등록 마감이 끝나버린 겁니다. 그 은진 교장을 지낸 장윤출 선생님이 해방 후 대광고를 거쳐 신일고 교장으로 계셨어요. 그 인연으로 신일고 음악교사가 됐는데 하루는 연대 김찬국(金燦國) 교수가 윤동주의 서시에 곡을 붙여보라는 겁니다."

―왜 선생께 그런 부탁을 했을까요.

"저도 의아했어요. 그래서 물어봤지요. '음대 선생들도 많은데 왜 제게 부탁하느냐'고. 그랬더니 김 교수가 '음대 교수들은 부탁해도 말을 안 듣는다'고 하더군요."

―'서시'도 눈 깜짝할 사이에 만들었습니까.

"곡이 잘 안돼 고민하던 차에 고2 시험감독을 들어갔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반에 서시가 표구가 돼 있었어요. 그렇게 안 만들어지던 곡이었는데 순간적으로 머리에 번뜩하더군요. 시험감독하면서 오선지(五線紙)에 그리기 시작했지요. 서시엔 두 가지 해석이 있어요. 문학사적으론 애국시로 분류되지만 사촌동생인 가수 윤형주는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저희 형님은 신앙시인'이라고."

―신앙시인?

"하늘이 하나님을 뜻하거든요. 별은 진리(眞理), 바람은 성령(聖靈)을 은유하기도 하고요."

3시간 대화가 끝날 때까지 노(老) 작곡가는 몇 차례나 수박을 권했지만 아내를 병석(病席)에 누인 노인의 수박에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4·19묘지에서 촬영장소를 물색하는데 꽤 괜찮은 자리에 60대 아낙 둘이 앉아있었다.

"잠시 자리 좀 피해주십사"하고 말할 요량으로 다가가는데 뜻밖의 말이 나왔다. 그들이 "전도(傳道)하러 왔느냐"는 것이었다. 신심(信心)은 남에게도 보이는 모양이었다. 촬영 후 '선생님'이 이번엔 수박 대신 추어탕을 재차 권했다.

 

2010.7.3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