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송가 해설
추천 : 892
[신앙상식] 예배 개혁에 관한 발표문(어느 청년의 글)
찬송가 해설
신학] 칼빈의 기독교 강요 요약
첨부파일로 2005년부터 연재된
찬송가 해설 글을 첨부파일로
올리니 참고 바랍니다.
참고로 찬송가 장번호는
구찬송가 장수입니다.
『교회음악』 김명엽 교수님
- 교회 음악아카데미 대표, 연세대학교 음대 및 대학원 졸업,
오스트리아 빈 음악원 수학, 서울시립소년소녀합창단 상임지
휘자 역임, 연세대 교수, 추계예술대 교수 역임, 교회 음악아카
데미 대표, 서울 바하합창단 지휘자, 국립합창단 예술감독. http://nationalchorus.or.kr/
2005. 10. 04
43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아무 때나, 어디서나..
작년 이맘때입니다. 저의 첫 아들이 군에 입대를 하게 되었지요. 그의 마음이 얼마나 심난 했겠습니까? 머리를 깎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히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불안한 기색이 확연했고, 안절부절 못해 하는 그의 행동을 보며 아버지인 저도 마음이 편안치가 않았습니다. 그 때에 저는 저희 식구와 함께 둘러 앉아 예배를 드렸지요. 그 때에 부른 찬송이 바로 이 ‘너 근심 걱정 말아라’였습니다. 이 찬송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었는지...
35년 전 제가 군대에 갈 때에도 바로 지금쯤이었는데 수요 기도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교회 목사님이 저희 집에 찾아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때에 부른 찬송이 이 찬송이었는데 군 생활 동안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후 제 인생길에 있어 어려움이 있을 때나 위험이 닥칠 때 이 찬송은 언제나 저에게 위로가 되곤 했거든요. 바로 제가 은혜 받은 그때 그 찬송을 군대에 갈 제 아들에게 다시금 그대로 전해준 셈이었지요.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계셨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실 것이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Be Strong and Courageous!)는 여호수아 1장 5,6절 말씀과 함께.
MARTIN이라고도 하고 또 어느 찬송가엔 GOD CARE라고 곡명이 쓰여진 이 곡조는 마아틴(Walter Stillman Martin, 1862-1935)목사가 곡을 짓고 그의 부인인 마아틴(Civilla Durfee Martin, 1868-1948)이 작사하였습니다. 마아틴 목사님은 이섹스에 있는 로우리(Rowley)태생으로 하버드 대학 출신의 침례교 목사였는데 후에 그리스도교회로 교단을 옮겨 1919년 아틀란타의 그리스도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그 해에 씨빌라 더피 홀든(Holden)과 결혼을 했습니다. 후에 그는 전도 집회나 부흥회에서 이름을 날리는 유명한 목사로서 복음사역을 했는데요. 음악적 재능이 풍부했던 마아틴 목사님은 대부분 그의 부인의 찬송 시에 곡을 붙였습니다. 6년 연하인 마아틴 부인은 캐나다의 노바 스코티아(Nova Scotia)의 졸단(Jordan)태생으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봉직했고 시집도 출판하는 등 많은 시를 발표했습니다. 부인의 시에 남편의 작곡으로 탄생한 부부찬송, 정말 보기에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찬송가에 수록된 이들 부부의 찬송으로는 이 찬송과 ‘내 죄 사함 받고서’(210장)가 수록되어 있고, 마아틴 목사의 곡조만인 ‘예수의 이름 힘입어서’(392장)와 ‘외롭게 사는 이 그 누군가’(413장)가 있습니다.
쇠약한 마아틴 부인의 간호로 병상을 떠날 수 없어 약속된 어느 교회 설교를 거절하려 전화를 걸려고 할 때 그의 아홉 살 난 아들이 “아빠! 하나님이 아빠가 오늘 밤 그 교회에서 설교하시길 원하신다면 아빠가 안 계시는 동안 하나님이 엄마를 돌보실 것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라는 말에 감동을 받고 흔쾌히 저녁설교를 하러 집을 나섰다고 합니다. 부인 역시 뜨거운 감동을 받아 아픔을 잊으며 “그래! 우리가 근심할 것이 뭐람? 하나님이 우릴 돌보시는데”하며 “어떤 일이 닥쳐도 낙망 말아라. 하나님이 돌보시리니!”(Be not dismayed whatever betide, God will take care of you)하며 이 찬송을 썼고, 설교를 마치고 돌아 온 그의 남편 목사님이 그 즉시 곡을 붙여 가족이 병상에 함께 둘러앉아 가족음악회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의 처음 두 마디에서 음이 반음씩 상승하다가 도약하는 것이 주를 믿는 마음에서 용기를 얻는 것 같은 느낌을 주며, 후렴에서 “주 너를 지키리 아무데나 어디서나”의 순차적 하행 선율은 주님이 우리를 쓸어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지요. 그리고 마지막 “지키리”, “주시리”의 늘임표는 영어 가사에서 ‘you’와 ‘care’에 붙어 있는데 주님이 우리를 굳게 지켜 주신다는 생각을 하며 부른다면 더욱 감동이 더할 것입니다.
제 아들처럼 군 입대나 입시를 앞두고 불안해하는 이들, 병이나 시험으로 낙심한 이들, 경제적으로나 갑작스레 닥친 위험으로 앞이 막막한 이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는 이들이나 계획을 가지고 유학이나 이민을 떠나는 이들에게 이 찬송은 최고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영어의 2절 가사와 같이 “매일 매일의 여정을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Through every day, over all the way; He will take care of you)의 위로가 우리를 강하고 담대하게 하실 것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아무 때나 어디서나”돌보시는 하나님을 느끼며 바라볼 수 있는 영안(靈眼)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2005. 10. 12
98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내가 주 예수를 알기 그 이전부터...
저는 결혼 이후 종종 아내에게 이런 질문을 받곤 합니다. “당신 언제부터 나 좋아했어?” “얼마나 좋아했었는데?” “나 예뻤어?” 등등...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그때 얼마나 당신이 예뻤었는지, 내가 얼마나 당신을 좋아했었는지 그 질문의 답은 결혼 20여 년 동안 수도 없이 가르쳐주었건만 아직까지도 듣고 싶은가 봅니다. 아마도 살아있는 동안 이 대화는 계속되겠지요.
이 찬송은 내가 주 예수를 알기 그 이전부터 이미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셨고, 그와 내가 만났을 때 비로소 내 영혼이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인 것입니다. “저 포도비유 같으니...”로 번역된 1절 마지막 부분의 원문 가사는 “나는 그의 것, 그는 나의 것, 영원히, 영원히”(For I am His, and He is mine, Forever and forever)라고 되어있어요. “나는 임의 것, 임은 나의 것”(I am my lover''''s and my lover is mine)이라 노래한 아가서 6장 3절이 생각나는데 나와 주님과의 뗄래야 뗄 수 없는 진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포도나무의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우리 찬송 번역가사에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는 말씀과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내 친구 되신 예수님, 날 구원하시려고 그 귀한 몸을 버리사 내 죄를 대속 했네”의 2절에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3-14)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주님의 친구인 나를 구하시려고 목숨을 버리셔서 살려 주셨기에 찬송 원문에서는 “내 마음, 내 힘, 내 삶, 나의 모든 것 다 주의 것 영원히”(My heart, my strength, my life, my all Are His, and His forever)라고 노래합니다. 그리하여 3절에선 어떤 형편에서라도 주님과의 믿음을 변치 않을 것을 약속하며 굳은 사랑과 우정을 다짐하고 있습니다.(Shall life or death, or earth and hell? No! I am His forever) 너무나 좋은 찬송이죠?
이 찬송의 작사자 스몰(James Grindly Small, 1817-1888)목사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태생으로 에딘버러 대학에서 공부한 영국자유교회 목사로서 두 권의 시집을 낼 정도로 평생 많은 시를 썼는데요, 이 찬송 시는 1863년 발행한 ‘부흥성가’(Revival Hymn Book) 제2집에 처음 발표하였고, 우리 찬송가에는 이 한편만 수록되어 있습니다.
FRIEND란 이름의 이 곡조는 스테빈스(George Coles Stebbins, 1846-1945)가 썼는데요, 스테빈스는 뉴욕의 버팔로(Buffalo)와 로체스터(Rochester)에서 음악공부를 하였고, 그의 나이 23세 때 시카고로 가서 찬송을 만드는 출판사에서 일하며 침례교에서 찬양대를 지휘하였습니다. 1874년 보스턴으로 옮겨 당대 유명한 복음성가 작곡가 생키, 블리스, 팔머, 루트 등과 교류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요, 우리 찬송가에는 ‘고난 받은 주를 보라’(12장), ‘저 멀리 푸른 언덕에’(146장), ‘너 성결키 위해’(212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217장), ‘후일에 생명 그칠 때’(295장),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321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330장), ‘영광 받으신 만유의 주여’(375장)등 많은 교인들의 애창곡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찬송은 찬송가 오른쪽 위에 표기되어 있는 대로 1878년 발간된 ‘복음성가’(Gospel Hymns) 제3집에 실어 발표하였습니다.
이 찬송 전체에서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 의 리듬 형태는 친구인 예수의 모티브처럼 반복되어 강조하고 있어 우리에게 더욱 친밀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찬송가에서 드물게 음악의 강세와 가사의 강세가 잘 들어맞게 번역되어 가사의 뜻을 잘 삭이며 부를 수 있어 자연스럽고 좋습니다. 우리나라의 국악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구요. 그래서 많이 애창되는가봅니다.
여러분은 친한 친구가 몇 명이나 되십니까? 그중에 가장 사랑하는 친구는 누구죠? 그와는 무슨 이야기라도 허물없이 감추지 않고 나누시지요? 그런데요 지금 사귀고 계신 친구보다, 아니 그 어떤 친구보다 더 좋은 친구 한 분을 소개할게요. 그 분은 오래전부터 여러분을 짝사랑하고 계시는 당신을 살려주신 진정한 친구인데요, 너무나 좋아하실 거예요.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럼 이제 새로운 친구를 만나보시죠.
I’ve found a friend, oh, such a friend!
2005. 10. 19
102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자랑과 기쁨은 오직 예수
영어로 예배를 worship이라고 합니다. WORTH, ‘가치를 드린다’는 뜻 아니겠어요? 크리스천들은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두고 있는 것이죠.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하면서 말입니다. 예장 소요리문답집의 제일 첫 질문이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입니다. 그 문제의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많은 분들이 이 말의 뜻을 전부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잘 들여다보면 “영원토록 그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자체가 나의 자랑이고 나의 기쁨이며 나의 인생관이란 말이겠지요. 이사야 61장 10절에 “야훼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나의 하나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공동번역)라고 했듯이 나의 기쁨이 없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을 좋아하는 나의 즐거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씀 아니겠어요? 저의 아들 중 한 아이가 어렸을 때 제가 책이라도 보고 있노라면 가끔 심각한 듯이 저를 툭 치면서 “아빠”하고 부릅니다. “왜?”라고 물으면 “그냥---”하고 돌아가지요. 그럴 때면 제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아버지인 나의 존재로 인하여 제 아들이 저토록 행복해한다면 부모 마음이 즐겁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이 부모의 영광이겠지요. 하나님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 하나님을 나의 가장 귀한 가치로 삼고 사는 인생관, 가치관을 노래하는 것이 모든 찬송의 내용이며 고백입니다.
세상의 부귀, 명예, 행복,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소중한 것이 예수라고 고백한 이 찬송은 미국 나사렛 감리교회 목사 부인인 밀러 여사(Mrs. Rhea F.Miller)가 1925년 작시한 것을 50년간 빌리 그레함 전도대회의 독창자로 봉사한 쉐아(George Beverly Shea,1909- )가 1929년에 작곡하였습니다. 이 찬송은 빌리 그레함 전도대회 때마다 쉐아의 굵은 베이스 목소리로 불려지고 갈채를 받아왔는데 그 때마다 그는 "이 갈채도 주 예수와는 바꿀 수 없습니다"라고 간증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80년대 초, 여의도에서 처음 열렸던 빌리 그레함 전도대회에 연합성가대의 일원으로 참석할 수 있었는데 그 때 들었던 팔십 고령인 베이스 가수 쉐아의 목소리의 여운이 지금도 귀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이 찬송을 참 좋아하는데요, 어느 날 이 찬송을 부르다가 특별한 것을 발견하고서 보물을 찾은 듯 무척 기뻐했습니다. 그것은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의 ‘것’ 음(音)이 모든 음보다 특히 높이, 옥타브 위에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 말씀 바로 앞 절에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기술되어 있듯이, 그 옛날 광야 생활 때에 불 뱀에 물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모세의 손에 높이 들린 구리 뱀을 보는 사람마다 모두 살아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고 믿는 사람마다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이 악보에서 ‘것’이란 음은 장대에 높이 달린 구리 뱀처럼, 아니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처럼 높은 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강대 위에 높이 달린 십자가, 교회 첨탑위에 높이 솟은 십자가, 그 십자가를 우리 삶에 최고의 가치로 삼고 바라보고 믿는 이마다 구원을 얻고 기쁨을 얻습니다. 세상의 부귀로 얻는 기쁨보다 기쁘고, 어떤 세상의 명예보다도 명예로우며, 그 어떤 세상의 행복함보다 행복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높인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모든 진주를 팔아 값진 진주 하나를 소유한 진주장사의 비유처럼(마 13;44-46) 세상의 즐거움, 세상의 자랑, 즐기던 일 모두 팔아 값진 가치의 예수를 사서 자랑하고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음표에 은혜로운 부분이 또 있습니다. 후렴에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에서도 마지막 종지 “없네”에서의 ‘네’음이 아멘과 같은 화음을 쓰고 있는데요, 이것은 바로 ‘아멘 종지’(終止, Amen Cadence)라고 합니다. 최고의 예수를 모신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죠. “이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아멘” 하고 말이죠. 우리의 자랑과 기쁨을 ‘오직 예수’께만 두고 살아가는 참 그리스도인의 귀한 찬송입니다.
2005. 10. 26
429장,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밤 같은 우리 인생길에 비추이는 빛
저는 어려서부터 이 찬송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멜로디가 너무 좋은 거예요. 처음엔 멜로디가 바삐 뛰어가다가 한숨 돌리고, 또 다시 뛰어가다가 한 숨 돌리고 하는 것이 제 맘에 들었던 거죠. 몇 군데 긴 음표에 화성이 바뀌는 것도 신기하기도 하구요. 그런데 제가 이 찬송을 더욱 좋아하기는 군대생활 때 깜깜한 밤을 경험한 이후부터입니다. 휴가를 다녀온 그 날은 저녁도 굶었었는데 야간산악훈련이란 걸 하다가 산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동료들의 말소리는 가까이 들리는데 앞이 깜깜하니까 어디가 동서남북인지 알 수가 있어야죠. 제 생각에 어림잡아 동료가 있는 곳으로 간다고 했는데 이내 그 목소리도 점점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밤새껏 애써 숲을 헤치고 오르다 지쳐 계곡을 따라 내려왔는데요, 날이 밝아 아침에 보니 너무 먼 곳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부대에서는 저를 찾느라 야단이 났고 저는 아침도 굶은 채 점심때가 되어서야 귀대할 수 있었지요. 깊은 밤, 별빛마저 없는 캄캄한 밤에 인도자가 없다면 우리는 한 걸음도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내 딴엔 확신을 갖고 열심히 걸어간 다해도 목표와는 더욱 멀리 갈 수도 있으니까요. 밤 같은 우리의 인생길에 갈 길을 비추이는 빛,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의 갈 길을 의탁하는 신앙의 아름다운 찬송입니다.
작사자 뉴만(John Henry Newman,1801-1890)은 영국 런던 태생의 영국 국교회 목사로서 영국국교회의 영적 기풍운동인 옥스퍼드 운동을 활발히 벌이다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종래엔 추기경에 까지 추대된 분입니다. 정확하게 찬송가에 표기된 대로 1833년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이태리의 시실리 섬에 요양하다 돌아오던 때입니다. 열병에 걸려 수주일간 생사를 왕래하다 원기를 겨우 되찾아 겨우 귤 운반선을 얻어 타고 귀국할 수 있었는데 파도에 흔들리는 배 위에서 흐르는 눈물을 씻으며 이 노래를 지어 읊었다고 전해집니다.
오른 쪽 위에 쓰여진 대로 LUX BENIGNA가 이 찬송의 곡 이름인데요, 라틴어로 ‘부드러운 빛’이란 뜻입니다. 이 곡의 작곡자 다익스(John Bacchus Dykes,1823-1876)는 너무나 유명한 분이죠? 영국의 훌(Hull) 태생으로 열 살 때부터 왕실교회에서 오르간을 배우고, 웨이크필드(Wakefield)와 켐브리지의 성 캐더린(St.Catherine)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탁월한 작곡가입니다. 성직자가 되어 더햄(Durham)에서 평생토록 목회를 하면서 300여 편에 이르는 찬송을 작곡했습니다. 오늘날 빅토리아 왕조 작곡가 중 최고란 칭송도 받고 있는 데요, 우리 찬송가에는 이 찬송 외에 많은 찬송이 있는데, ‘거룩 거룩 거룩’(9장), ‘성전을 떠나가기 전’(59), ‘귀하신 주의 이름은’(81장), ‘구주를 생각만 해도’(85장), ‘오 젊고 용감하신’(129장), ‘성도들아 다 나아와’(140장), ‘바다에 놀이 치는 때’(477장), ‘주와 같이 되기를’(508장)등이 그 것이고, ‘내가 한 맘으로’(17장)는 그의 편곡입니다.
이 곡을 보면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 데”의 앞 두 마디엔 가사가 많이 붙어 있는데, 뒤 두 마디에선 “빛 되신 주” 네 음절 밖에 안 되지요? 이럴 땐 ‘템포 디 루바토’(Tempo di rubato)로 노래하면 훨씬 생동감이 듭니다. ‘템포 디 루바토’란 이 네 마디 안에서 속도는 변하지 않고 두 마디는 점점 빠르게(accel.) 노래하고, 나머지 두 마디는 점점 느리게(rit.) 노래하라는 음악용어입니다. “저 본향 집을 향해---”도 같은 리듬 형태이니까 같은 요령으로 부르면 되고, “내 가는 길”부터는 정상적인 제 속도로 부르면 됩니다. 그리고 1절 “깊은 데”에서의 ‘데-’와 “알지 못하나”의 ‘나-’, 그리고 “비추소서”의 ‘서-’와 “하소서”의 ‘서-’와 같은 긴 음표의 화성 바뀌는 부분은 뜻을 생각하면서 불러야겠지요. 또 반진행(反進行) 하는 곳이 많지요? 예를 들어 “멀고 밤은 깊은 데”의 소프라노 선율은 하행(下行)을 하는 데, 베이스 선율은 상행(上行)하면서 공간이 좁아지지 않습니까? 이런 부분을 더욱 섬세하게 표현해서 합창의 미(美를)를 만끽할 수 있겠지요. 특히 “한 걸음씩”,“주 뜻대로”, “기쁨으로”의 사분음표가 한 박자 한 박자 주님과 함께 손 붙잡고 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처음엔 멀고 깊은 밤이었는데, 마지막엔 밝은 아침으로 끝나는 희망과 기쁨에 찬 아름다운 찬송입니다.
2005. 11. 02
542장,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하늘로 들어가는 입구, 꿈의 문
남달리 노래를 무척 좋아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저와는 소년시절부터 둘도 없는 저의 가장 친한 벗인데요, 늘 상 저만 만나면 중창으로 화음 맞춰 노래하길 즐겼었고, 좋아하는 많은 노래 중에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바로 이 찬송을 유난히도 좋아했습니다. 그가 어렸을 적 어린 사무엘처럼 꿈을 꾼 일이 있었는데 평생 그 꿈을 기억하고 이루어지기를 믿고 바라며 지냈습니다. 우리가 대학을 졸업한 후 그가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사랑하는 친구를 보내며 주일예배 시에 이 찬송을 골라 특순으로 부르게 되었는데요, 그만 목이 메어 노래를 제대로 잇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후에도 이 찬송을 부를 때면 저는 그 친구를 그리워하고 마음속으로 우리의 우정을 깊이 나누곤 했지요.
성경에는 꿈에 관련된 이야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야곱, 요셉, 다니엘, 사무엘 등등. 꿈을 흔히 하나님의 계시로 보고 있는데요, 이 찬송은 제목 밑에 관련 성구로 보아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의 꿈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부모형제 고향을 떠나 급히 도망쳐 나온 야곱, 들에서 해가 지고 사방이 점점 어두워지며, 여기저기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캄캄한 밤, 지친 몸으로 돌을 베개로 하여 홀로 누워있는 고독한 인생, 얼마나 불안하고 앞길이 막막했겠습니까? 아마도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을 보았을는지 모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 가장 먼 곳을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가 어느새 잠이 들어 꿈을 꾸었겠지요. 하늘에서 땅에 닿은 사닥다리가 보이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꿈을 말입니다. 그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내게 되지요.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후 “주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하며 “이 곳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구나” 하고선 아주 유명한 말을 합니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라고요. 그렇습니다. 가장 고독한 그 순간이 하늘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꿈의 문, 곧 비전의 문이 아니겠습니까?
이 찬송의 작사자 파운즈(Jessie Brown Pounds, 1861-1921)는 미국 오하이오 주의 하이람(Hiram)태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글재주에 뛰어나 많은 시를 썼고, 신시나티의 스탠다드 출판사에서 편집인으로 근무하다 그리스도교회의 목사인 죤 파운즈와 결혼하였고, 평생 400여 편의 찬송시를 비롯하여 50여 편의 칸타타의 가사와 시집 등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이 찬송과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497장) 두 편이 실려 있습니다.
MY WONDERFUL DREAM인 이 곡조의 작곡자는 미국 아이오와 주 윌튼(Wilton) 태생의 저 유명한 가브리엘(Charles Hutchinson Gabriel, 1856 -1932)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이미 17세 때부터 유명해졌고 음악교사로 있다가 이 후 샌프란시스코와 시카고, LA 등지에서 성가대 지휘자로, 작곡가로, 출판사 편집자로 있으면서 성가집, 주일학교 노래집, 칸타타, 찬송가 등 많은 책을 출판 하였습니다. 무려 8천여 곡을 작곡한 그의 찬송은 우리 찬송가에 무려 11편이나 수록되어 있는데요, 그 중 그가 작곡한 찬송은 ‘샤론의 꽃 예수’(89장),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208장), ‘고생과 수고 다 지난 후’(289장), ‘나 죄 중에 헤매며’(494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507장),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차도’(513장), ‘저 높은 곳을 향하여’(543장),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544장)등 7장이며, 그가 작사한 찬송은 ‘주 나에게 주시는’(207장), ‘고생과 수고 다 지난 후’(289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507장),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544장) 등 4장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작사도 하고 작곡도 한 찬송가도 여러 장 되는 것이죠. 그 모두 멜로디가 아름답고 은혜가 넘치는 곡들입니다. 그가 편곡한 찬송도 한 장 있는데 ‘그 어린 주 예수’(113장)가 그 것입니다.
저와 저의 친구는 지금도 이역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 아름다운 소망의 찬송을 부르며 그 옛날 소년시절에 꾸었던 장차 이루어지고야 말 놀라운 꿈을 그려보곤 합니다.
2005. 11. 09
44장, 찬송하는 소리 있어
천만 신도들이 기뻐 찬양하는 하늘의 소리
내 기억에 있어 처음 불러 본 노래는 여섯 살적에 듣고 배운 찬송들입니다. 전쟁으로 고아가 된 저는 가난과 역경의 그 어려운 피난살이 가운데서도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늘 흥얼거리는 고모님의 찬송소리를 들으며 지냈으며, 절망과 실의에 찬 어린 저는 저녁마다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고모님의 품에 안겨 성경 이야기와 찬송을 들으며 잠이 들 곤 했습니다. 그 시절 자연스레 배운 첫 찬송이 바로 이 ‘찬송하는 소리 있어’입니다. 이제와 돌이켜 어린 그 때 저의 마음에 주님이 이 찬송과 함께 들어오시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찬송은 저에게 있어서만큼은 주님과 처음 만난, 그야말로 기념비적이고 역사적인 찬송인 것이죠.
이 찬송은 우리나라 교인들에겐 퍽 뜻 깊습니다. 작사자인 스왈론(William Swallon, 1859-1954)목사는 미국 오하이오주 패리스(Paris)태생으로 개화 이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48년간 봉사한 소안론(蘇安論)이란 한국이름의 선교사입니다. 그는 외국인 중에 우리말을 가장 잘했다고 하는데요, 우리말로 성경통신강좌와 성경공과교재도 편찬하고, 우리말로 찬송시도 여러 편 작사하였습니다. 이 찬송은 아일랜드의 켈리(Thomas Kelley, 1769-1854)목사 작시로 표기된 찬송도 많이 있는데요, 그것은 스왈론 목사가 켈리 목사가 1806년에 쓴 찬송인 ‘들어라 천만의 비파와 찬송소리를’(Hark, ten thousand harps and voices)에 영감을 받아 순전한 우리말로 작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양 선교사가 작사한 것이기에 어딘가가 어색한 부분도 있긴 하지만 워낙 입에 붙어 있어 정감 있는 노래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스왈론 목사의 찬송이 368장 ‘내 죄를 회개하고’ 한 편이 더 수록되어 있습니다.
HARWELL이란 이 곡조는 미국 찬송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메이슨(Lowell Mason, 1792-1872)이 1840년에 작곡한 것 입니다. 작곡자 메이슨에 관해서는 찬송가 364장 ‘내 주를 가까이’에서 소개했으므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그가 작곡한 많은 찬송들은 우리나라 교인들에게 많이 애창되고 있습니다. 이 찬송은 몇 부분에 있어 틀리게 부르는 데요, 8째 마디 “거룩 거룩합니다” 다음에 사분쉼표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 쉼표를 생략하고 서둘러 “천하사람 찬양하자”로 당겨 부르고 있는데 이를 조심해야 합니다. 원래 못 갖춤 마디로 시작되는 노래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1-4마디와 5-8마디가 같은 멜로디이기 때문에 더욱 틀리기 쉬운 것이죠.
첫째 단 마지막과 둘째 단 마지막 마디가 똑 같은 악보 같지만 곰곰이 살펴보면 둘째 단 마지막 마디에 사분쉼표가 더 있죠? 그리고 작은 음표로 베이스 파트가 그려져 있고... 그것은 팀파니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틀리지 않게 부르려면 “거룩 거룩합니다”의 “다”를 세 박자라고 생각하고 길게 불러야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 기뻐하도다”는 짧게, “거룩 거룩합니다”는 길게 불러야하는 것이죠. 그 다음 셋째 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천하사람 찬양하자” 다음에도 사분쉼표가 있죠? “거룩하신 하나님께”에는 쉼표가 없이 “할렐루야”로 당겨지고... 그래서 이 부분은 “천하사람 찬양하자”는 길게, “거룩하신 하나님께”는 짧게 불러야겠지요. 쉼표를 살려서 정확히 부르면 더욱 좋고요... 이 찬송을 우리나라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는데요, 3박자 장단의 우리 민요를 닮은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A(1-4)A(5-8)B(9-12)A(13-16)의 아주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기도 하고, A의 모티브가 ‘솔도미레’의 네 음만으로 되어 있지요. B부분인 후렴에서 ‘파’가 추가되어 ‘도레미파솔’ 다섯 음으로만 되어있는 노래입니다. 그러다보니까 ‘도레미솔라’의 우리 음계로 알고 ‘파’를 정확히 부르지 못하는 분들이 많아요. “천하사람”의 ‘천’과 “찬양하자”의 ‘하’음을 정확히 불러야겠습니다.
찬송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구원받은 하늘의 천만 신도들이 기뻐 찬양하는 하늘의 소리 말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이 태어나시던 날 목자들에게 들려줬던 천군천사들의 빛나는 소리일 수도 있고요. 이를 듣고 지상의 천만 신도들이 기뻐 화답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이라고요. 후렴의 “할렐루야”가 아래 나(d)음에서 점점 상승하여 옥타브 위의 나(d)에 이르는 것을 보면 우리의 찬송소리가 보좌 위의 하나님께로 상달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 찬송에서 특히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죠? ‘거룩’이란 단어가 일곱 번이나 나오는데요, 이는 바로 하나님의 보좌 앞임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옷자락을 보았을 때 들었던 천사들의 그 노랫소리가 아니겠습니까?(사 4;8) 3절의 “주여 속히 임하셔서”는 성경의 마지막에 “마라나타” “주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주님 오시길 대망하는 사도 요한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크리스마스 4주 전 대림절의 예배찬송으로 불려도 좋을 것입니다.
2005. 11. 16
500장, 주 음성 외에는
주님은 매순간마다 필요 합니다
오래 전에 기독공보에서 어느 목사님이 ‘개만도 못한 나’란 제목으로 글을 쓰신 것을 보았습니다. 글을 쓰신 분이 제가 존경하는 훌륭한 분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분의 이미지에 적당치 않은 제목이기도 해서 더욱 제 눈길을 끌었었지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부흥집회를 인도하느라 오래 집을 비웠다가 돌아오는 목사님에게 그가 기르시는 개가 마중 나와 껑충껑충 뛰면서 막 달려들고, 마당을 뺑글뺑글 돌면서 반가와 하는 것입니다. 그걸 보면서 목사님은 생각했습니다. “저 개가 주인인 나를 이토록 좋아하는데 주님의 종인 나는 내 주인인 하나님을 이토록 좋아할까? 아, 나는 개만도 못하다.” 그래서 쓰신 글의 제목이 ‘개만도 못한 나’였습니다.
‘주 음성 외에는 더 기쁨 없도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만 들어도 무한한 기쁨이 되지요? 젊은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이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혹 군대에 보냈다든지 멀리 떠나보낸 자식의 전화 목소리를 연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이와의 대화는 우리를 언제나 기쁘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이사야가 고백하듯이 ‘내가 여호와로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사 61;10)라 했습니다. 공동번역에는 ‘야훼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 생각만 하면 마음이 기쁘고 가슴이 뛰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는 어떻겠어요?
그런데 이 찬송은 원래 작시된 내용과 많이 다른데요, 우리 찬송가사가 더 은혜로워 보입니다. 찬송가 악보 오른 쪽에 보면 NEED라고 쓰여 있지요? 이것은 이 곡을 작곡한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가 작곡한 멜로디의 이름인 곡명(Tune Name)인데요, 이 곡명도 영어찬송의 첫 구절인 “주님은 매순간마다 필요 합니다”(I need Thee every hour)에서 온 것입니다. 작사자 호크(Annie Sherwood Hawks, 1835-1918)는 미국 브룩클린의 핸슨플레이스(Hanson place)의 침례교회 교인으로서 담임목사였던 유명한 찬송작가인 로우리 목사의 권유와 지도로 많은 찬송시를 썼습니다. 당연히 곡조는 로우리 목사님께서 붙였지요. 로우리 목사님의 찬송은 우리 찬송가에 상당히 많습니다. ‘무덤에 머물러’(150), ‘나의 죄를 씻기는’(184) ‘주 사랑하는 자’(249), ‘여러 해 동안 주 떠나’(336), ‘울어도 못하네’(343), ‘성자의 귀한 몸’(356), ‘나 위하여 십자가에’(403), ‘나의 갈 길 다 가도록’(434), ‘천성을 향해 가는 신도들아’(401)등 이토록 많이 실려 있으니 그 외에도 얼마나 많겠어요?
1872년 6월 화사한 초여름 바로 지금쯤, 안락의자에 앉아 평안을 느끼며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화평한 가정과 삶이 하나님의 크신 은총임을 깊이 느끼게 되어 ‘만일 내게 주님이 안 계셨다면 나의 기쁨이 누구의 것이 될까? 만일 주님이 나와 동행해 주시지 않는다면 나의 슬픔을 누가 위로해 줄까? 주님은 매일 마다, 매 시간마다 필요한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고, 그 즉시 이 찬송시를 쓰게 된 것이지요. 실제로 그는 스물두 살 행복한 신혼생활 때의 고백으로 썼지만, 삼십 년쯤 세월이 지난 후 남편을 잃은 쉰 세 살 때에 비로소 그 옛날 자신이 고백했던 대로 절실하게 주님을 필요로 했고 자신의 찬송으로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 옛날 말이지요. 마치 사극(史劇)에서 임금님이 쓰시는 궁중용어 같지요? ‘주님 정말 끝내줍니다. 너무나도 행복해요’라는 요새 언어로 바꾸어 생각하며 부르면 어떨까요?
저희 집에도 ‘레미’라고 하는 작은 개가 있습니다. 멀리서 제 기침 소리만 들려도 달려오곤 하지요. 그러면 저는 달려가 안고 즐거움을 함께 나눕니다. 우리의 귀도 조금만 열면 주님의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잔치를 베풀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그때에 가슴 벅차 이런 고백이 터져 나오겠지요?
“주 음성 외에는 더 기쁨 없도다”
2005. 11. 23
364장, 내 주를 가까이
가장 낮고 가장 겸손할 때
‘타이타닉’(Titanic)이란 영화 보셨습니까?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이 빙산과 충돌하여 파선을 당해 승객들이 살겠다고 아수라장이 되어 우왕좌왕하는데도, 자리를 지키며 그들과는 아랑곳없이 꿋꿋이 연주를 하던 악사들 기억나시죠? 모든 사람들이 떠나가 연주를 들을 사람도 없어지자 이젠 그만 헤어지자고 악기를 챙겨 들고 떠나가게 되지만 한 악사는 가던 길을 다시 돌아와 악기를 꺼내고 연주를 시작하게 되는 데 그 곡이 바로 이 ‘내 주를 가까이’였지요. 가던 악사들도 다시금 돌아와 연주를 하던 장면, 세계적인 아마데우스 현악사중주단의 연주도 절묘했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실제 이야기는 더욱 감동스럽습니다.
1912년 4월 14일 ‘타이타닉’호가 침몰하여 많은 승객들이 차디찬 얼음 바다에 빠져 죽음을 앞두고 허덕이고 있을 때 그 중 어느 사람의 입에서부터인가 이 찬송이 흘러 나왔다고 합니다. 캄캄한 겨울바다, 암흑과 절망 가운데 추위에 점점 얼어 식어가는 몸으로 살 가망이 없었던 그들이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이 찬송을 따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 때 희생자가 무려 1645명이었다고 하는데 그 중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찬송하며 하늘 문이 열린 것을 보았던 것이죠.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이 찬송의 작사자인 아담스(Sarah Flower Adams, 1805-1848)여사는 영국의 할로우(Harlow)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비상하여 잡지에도 많은 발표를 하였고 연극에도 재능이 있어 연극배우로도 활동하였습니다. 결혼 후에도 연극을 계속했는데 건강이 나빠져 요양하면서 찬송시에만 몰두했는데, 1840년 교회에서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에 관한 설교를 들은 후 그 목사님의 권유로 이 찬송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 찬송의 작곡가 메이슨(Lowell Mason, 1792-1872)은 미국 매사츄세츠 주의 메드필드(Medfield) 태생으로 죠지아 주의 사바나(Savannah)와 보스턴, 뉴욕 등지에서 교회성가대 지휘자, 오르가니스트, 작곡가로서 교회에서 봉사한 미국의 대표적인 찬송가 작곡가입니다. 그는 보스턴 음악학교도 창립했고, 후에는 뉴욕대학에서 미국 최초로 음악박사학위를 받은 미국 음악교육의 개척자이기도 합니다.
메이슨 박사의 곡조는 우리 찬송가에 ‘찬송하는 소리 있어’(44장), ‘지난 이레 동안에’(56장), ‘우리 구주 나신 날’(121장), ‘날 구원하신 예수를’(196장), ‘저 높고 넓은 하늘이’(237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248장), ‘저 북방 얼음산과’(273장), ‘어둔 밤 쉬 되리니’(370장), ‘못 박혀 죽으신’(435장), ‘맘 가난한 사람’(516장) 등 11편과 ‘만 입이 내게 있으면’(23장), ‘영광의 왕께’(31장), ‘즐겁게 예배할 날’(57장), ‘지난밤에 보호하사’(66장), ‘기쁘다 구주 오셨네’(115장), ‘한 밤에 양을 치는 자’(124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147장), ‘구주여 크신 인애를’(170장), ‘샘물과 같은 보혈’(190장), ‘생전에 우리가’(280장), ‘내 평생소원 이것 뿐’(376장), ‘주 믿는 형제들’(525장) 등 12편의 편곡 등 23편이나 실려 있습니다. 이 곡조 ‘BETHANY’는 1856년 작곡하여 앤도버 신학교 교수들이 편찬한 ‘안식일찬송가’(Sabbath Hymn & Tune Book)에 수록 발표하였습니다.
저는 이 찬송가에서 ‘돌’이라는 단어가 제일 눈에 띕니다. 돌베개를 하고 밤하늘을 쳐다본 적이 있습니까? 언젠가 추운 겨울 꽁꽁 얼은 눈 덮인 산정호수 강 한복판에서 저의 네 식구가 벌렁 누워 밤하늘을 쳐다본 적이 있습니다. 일어나 앉았을 때에는 잘 보이지 않던 하늘의 별들이 머리를 바닥에 대고 바라 볼 때에는 우리를 향해 막 쏟아져 내려오는 것 같아요. 별들이 합창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가장 캄캄한 밤에 가장 멀리 있는 별이 보인다고 하죠?
가장 낮고 가장 겸손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인생에 있어 가장 고독했던 시절, 야곱이 돌베개를 하고 하늘을 쳐다보았을 때 하늘로 뻗은 사닥다리를 발견하게 되고, 도움의 천사를 만나게 되지요. 그는 드디어 거기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로부터 큰 꿈과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 길 되나니 은혜로다"라는 고백도 야곱과 같은 절망과 고독의 외로운 지경에서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요, 돌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4절에 있어서 야곱은 바로 그 ‘돌’로 제단을 쌓게 되지요. 이 어찌 복된 돌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 짐 같은 고난의 돌, 외로움의 돌, 멀고도 험한 시련의 돌, 이 모든 것들이 놀랍게도 하나님께 예배할 찬송의 돌단으로 쌓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 합니다"라고 고백하길 바라고, 이 세상 마치는 날 유언까지도 그렇게 뇌이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2005. 12. 01
248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바라던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하는 감격
새천년을 여는 지난 2000년 1월 1일 0시 저 판문점에서는 백 남준씨의 퍼포먼스가 있었던 것 기억하시죠? 남북을 가로막은 얼음으로 쌓은 벽이 타오르는 불길에 녹아 무너지던 모습 말입니다. 저는 그 새벽, 차디찬 얼음 덩어리가 무너지며 서로가 하나 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없는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바로 시온의 영광이 밝아오는 새해를 꿈꾸었던 것이죠. 이 찬송은 노랫말에 있어서나 곡조에 있어서나 그토록 바라던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하는 벅찬 감격을 너무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본문에 적합한 찬송을 고르곤 하는데,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이 찬송 한 장으로 이사야서 전체를 요약한 것이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사야 60장에 장차 오실 예수님을 대망하면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예언한 말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어둡고 죄악으로 가득한 세계에 그리스도의 빛을 밝게 비추어 죄의 종이 되었던 인간들을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돌아오게 하는 장면을 감격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슬픔’ ‘애통’의 ‘어둡던 이 땅’이 ‘시온의 영광’이 비치므로 ‘빛나는’ ‘아침’으로 ‘밝아’ ‘기쁨’으로 화하며, 2절에서 ‘매였던 종’들도 집에 돌아와 ‘복을’누리고, 3절에서 ‘말랐던’ ‘광야’에 ‘시냇물 흘러’ ‘화초가 피고’, 4절에서 이 전에 ‘싸움’ ‘죄악’ ‘참혹한 땅’이었던 곳에 감사에 넘쳐 ‘은총’을 찬송하는 그야말로 웅장하고도 감격에 찬 찬송입니다.
성경적이면서도 은혜스러운 이 찬송은 6백여 편의 찬송 시와 1천 곡 이상의 찬송 곡을 남긴 미국 코넥티커트주의 워싱톤 출생인 헤이스팅스(Thomas Hastings, 1784-1872)가 1830년에 작사하였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교육이 전부이고, 지독한 근시이면서 변백종 등 병약한 환경에서도 독학으로 음악공부를 하여 18세 때 찬양대 지휘자로, 22세 때 음악교사가 되었고, 이 후 ‘성음악’(Musica Sacra) 찬송집을 비롯해 신앙 잡지를 내는 등 그야말로 전 생을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 바친 분입니다. 그가 작사한 찬송으로는 우리 찬송가에 이 찬송을 비롯하여 ‘자비하신 예수여’(450장)가 수록되어 있고, ‘만세반석 열리니’(188장)는 그가 작곡한 곡입니다.
‘웨슬리’(WESLEY)란 이름의 이 곡조는 미국 최초의 음악박사인 메이슨(Lowell Mason, 1792-1872)박사가 헤이스팅스가 작사한 같은 해인 1830년에 작곡하였습니다. 메이슨의 찬송가는 우리 찬송가에 이 찬송을 비롯하여 ‘내 주를 가까이’(364장), 그리고 ‘찬송하는 소리 있어’(44장), ‘즐겁게 안식할 날’(57장), ‘우리 구주 나신 날’(121장), ‘날 구원하신 예수를’(196장), ‘저 높고 넓은 하늘이’(237장), ‘저 북방 얼음산과’(273장), ‘어둔 밤 쉬 되리니’(370장), ‘못 박혀 죽으신’(435장), ‘맘 가난한 사람’(516장) 등 11편의 작곡과 ‘기쁘다 구주 오셨네’(115장), ‘구주여 크신 은혜를’(170장),‘내 평생소원 이것 뿐’(376장) 세 편의 편곡 등 14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광복절하면 태극기 들고 거리에 나와 막 뛰어 다니는 것. 강아지들도 뛰고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할 것 없이 좋아 날뛰는 날이다 이렇게 생각해왔어요. 사진에서, 라디오에서, TV에서 그렇게 보아왔거든요. 성경에 보면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만군의 찬송소리로 떠들썩하리라고 했는데, 바로 그 날이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일거라 생각합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이 나라와 이 세계를 소망하며 이 찬송을 힘껏 불러 봅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어둡던 이 땅이 밝아 오네”
2005. 12. 07
325장, 주 예수 대문 밖에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물러가는 것
우리는 아름다운 광경이나 예술작품을 보다가 감명을 받아 그 인상을 글로 혹은 노래로 표현해 보고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주 예수 대문 밖에’가 바로 그런 경우인데요, 가꾸지 않은 정원의 숲이 을씨년스럽고, 언제 열어봤는가 싶은 먼지 쌓인 문, 그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애타게 두드리시는 예수님이 서 있는 것입니다. 홀만 헌트(Holman Hunt)의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란 유명한 성화가 있는데요, 그 그림을 빼 담은 찬송이 바로 이 찬송입니다.
영국의 ‘빈민의 목사’라고 칭송을 받는 하우(William Walsham How, 1823-1897)감독이 잉겔로우(Jem Ingelow)가 지은 장시 ‘형제들과 한 설교’를 읽고 이 그림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오 부하고 강한 자들아! 행복한 젊은이들아! 듣고 있나? 문을 두드리시는 분의 손이 지치셨는데도 참고 계시는 모습을 보아라. 그 상한 마음이 영영 떠나기 전에 어서 문을 열어라.” 바로 이 시는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라는 계 3:20을 의역한 것이고 이 그림 역시 그 말씀이 주제였기 때문입니다. 감동한 하우 목사는 몇 번이고 이 구절을 되 읊고 그림을 보고 하다가 단숨에 이 찬송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 찬송시는 1867년 하우 목사와 모렐(Thomas Morrel)목사가 공동으로 편집한 [시와 찬미]에 수록 발표되었습니다.
하우 감독은 영국태생으로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1845년 영국교회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국내외 여러 교회에서 시무했고 후에 동 런던(East London)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특히 동 런던은 극빈자들이 많아 평생을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그들을 위해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50편 이상의 찬송시를 썼는데 우리 찬송가에 이 찬송과 함께 ‘나 가진 모든 것’(69장), ‘참 사람 되신 말씀’(240장) 등 세 편이 실려 있습니다.
시와 그림 두 작품의 영감으로 찬송시가 나왔듯이 곡조 역시 여러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독일태생의 작곡가이며 오르가니스트이고 지휘자인 크네헤트(Justin Heinrich Knecht, 1752-1817)와 그의 동료인 크리스트만(Johann Friedrich Christmann)이 1793년에 처음 여덟 마디를 작곡했고, 1799년 허즈밴드(Edward Husband, 1843-1908)가 나머지 곡조를 추가하여 발표한 것입니다. 곡명인 ST. HILDA는 17C 왕족이었던 여류 신앙인의 이름으로 교계와 정계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분입니다.
저는 1절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밖에 세워두니 참 나의 수치라”하는 대목을 노래하다가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평생 주님을 믿는다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한다고 했으나 주님은 계속 문밖에 세워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저의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문은 계속 닫혀 있지는 않은가 해서 말입니다. 노래하고 있는 지금도 주님이 아닌 다른 것들로 꽉 채워져 있어 문을 열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뜻 없이 부르는, 주님과의 만남 없이 부르는 우리들 마음 문 앞에서 주님은 아직도 못 박히신 피 묻은 손으로 계속 간곡하게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네 죄로 죽은 나를 너 박대할소냐?”
저는 이 찬송에서 마지막 대목이 언제나 감격스럽습니다. “나 죄를 회개하고 곧 문을 엽니다. 드셔서 좌정하사 떠나지 마소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즉시 기뻐 문을 엽니다. 간혹 커튼을 닫고 늦잠을 자다가 일어나 창문을 열면 찬란한 아침 햇살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오지요?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부분은 서둘러 점점 세고(cresc.) 점점 밝게 그리고 극적으로 노래해야 합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여기 앉으세요”하며 감격에 넘쳐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기도를 하면서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기도를 많이 드리게 됩니다. 기도를 한다고 무릎은 꿇으면서도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채 듣기도 전에 내 할 말만 쏟아 놓고 일어선다면 주님은 말씀 한마디 못하시고 돌아서지 않을까요? 우리들의 마음 문 앞에서 말씀하시고 싶어 하시는 주님을 향해 “여기 머무사이다” 하며 맞아들여야 하겠습니다.
2005. 12. 14
505장,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오, 당신 같이 되고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자아이를 낳으면 8일 만에 할례를 행하였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예수라고 이름을 지었는데요, 성탄일인 12월 25일로부터 여드레째 되는 날은 정월 초하루가 됩니다. 바로 새해인 1월 1일은 ‘예수 할례일’이고, 따라서 예수라 이름을 지은 예수 ‘명명일(命名日)’이기도 합니다. 교회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직 성탄절인 셈이죠. 우리는 보통 12월만 들어서면 백화점에서 성탄 캐럴이 흐르고, 교회에서도 성탄 행사를 합니다만 실상 성탄절은 12월 25일 0시부터 1월 6일까지 2주간입니다. 성탄을 조용히 기다리며 모셔야 할 성탄 4주전의 대림절(待臨節, Advent)이 상업주의에 물들어 오염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도 전에 성탄행사를 다 치루고, 정작 예수님이 태어나신 성탄절 아침은 그야말로 썰렁하지 않습니까? 어쨌든 성탄절은 12월 25일부터 주현일(主顯日, Epiphany) 1월 6일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새해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절기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을 보신 적 있으시죠? 특히 예레미야서를 보면 "마음의 가죽을 베라"고 씌어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한다 해도 주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씀이겠지요.
이 찬송가의 원제목은 찬송가 왼쪽 하단에 있는 바와 같이 ‘오, 당신 같이 되고자’(O, to be like Thee)입니다. 평생 학교 문턱에도 가 본 일이 없으면서도 고향의 학교에서 교사로, 신문사에서 문필 생활을 하며 창작활동을 편 감리교 목사인 치숌(Thomas Obediah Chisholm, 1866-1960)이 작시하였습니다. 그가 쓴 찬송 시는 약 1200편쯤 되는데요, 주로 성경 구절들을 의역한 것이 많습니다. 치숌 목사의 찬송은 우리 찬송가에는 447장 ‘오 신실하신 주’와 함께 두 장만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505장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이 찬송은 1893년에 쓴 그의 첫 작품으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당부한 말씀인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1절은 우리의 최고의 관심사가 예수를 닮아 그 분의 분량에까지 이르는 것, 곧 성화(聖化)되기를 간구하고 있고, 그리고 2절과 3절에선 구체적으로 우리가 닮아야 할 그분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찬송 가사 가운데 이 대목이 가장 인상적인데요, 마지막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입니다. 원래 가사는 이렇습니다. “내 마음 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깊이 찍어 주소서”(Stamp Thine own image deep on my heart)입니다. 주님께서 “너는 내 것이다”라고 소 엉덩이에 도장을 지져서 새기듯이 찍어 달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 ♩ 리듬패턴이 열여섯 번이나 반복되면서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 찬송 멜로디는 미국의 저명한 교회음악가요, 찬송작곡가인 커크패트릭(William James Kirkpatrick, 1838-1921)이 1897년에 작곡한 작품입니다. 커크패트릭이 지은 찬송가는 이 찬송 외에도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43장), ‘생명의 주여 면류관’(139장), ‘신랑 되신 예수께서’(162장), ‘이 기쁜 소식을’(179장), ‘먹보다도 더 검은’(213장), ‘기쁜 소식 들리니’(252장), ‘어둔 죄악 길에서’(262장), ‘나 주를 멀리 떠났다’(331장), ‘구주예수 의지함이’(340장),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362장), ‘주의 사랑 비췰 때에’(414장), ‘오 놀라운 구세주’(446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455장),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483장) 등 열다섯 편이나 수록되어 있는데 그 어느 하나도 은혜롭지 않은 곡이 없지요.
우리는 주님을 너무 존경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을 닮으려고 하지는 않지요. 저 역시 겉모양은 믿음이 좋아 보이는 교인인데 속모양은 너무나도 주님을 닮지 않았어요. 제 아이를 보고 모두들 저를 빼 닮아 붕어빵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기쁜지 아세요? 주님도 아마 그 분의 자녀인 우리가 주님을 빼 닮기를 바라시지 않겠습니까?
2005. 12. 21
115장, 기쁘다 구주 오셨네
온 세상 죄를 사하러
“제주도 피난길에서 만난 크리스마스를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정구공 한 개와 노란 양말 한 켤레. 그 땐 정말 싼타 할아버지가 주고 가신 줄 알았습니다. 지금 환갑이 지났어도 싼타를 기다립니다. 아까 예술의 전당에서 푸짐한 선물을 나누어 주는 싼타를 보았습니다. 22곡의 크리스마스 캐럴과 바하의 합창곡을 80여 명의 관현악단과 100여명의 합창단이 부르는 장엄한 무대, 그 곳에 싼타가 있었습니다. 55년 전에 나에게 전해 준 정구공과 노란 양말이 오버랩 되면서 나는 두 시간동안 행복 했습니다. 때 맞춰서 내리는 흰 눈을 맞으며 정말 행복 했습니다.” 이 글은 지난 주간 제가 지휘하는 합창단 연주회를 마친 그 밤에 저의 오랜 친구가 보내 준 메일 중 일부입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누구나 어린이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지요. 마구 간의 아기, 흰 눈,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와 양말, 그리고 선물,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즐거운 캐럴, 자선냄비와 함께 울리는 구세군의 종소리... 이 모든 것들이 크리스마스를 더욱 아름다운 동화세계로 만들곤 합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이 찬송은 ‘영국 찬송가의 아버지''''''''로 불리는 왓츠(Isaac Watts, 1674-1748)가 1719년에 작시한 찬송입니다. 왓츠는 청년시절부터 당시 교회에서 불리는 시편가가 마음에 안 들어 시편 전체를 신약의 관점에서 의역 시편가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찬송은 신약의 복음의 빛으로 재해석하여 상황에 맞도록 적용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이 찬송은 시편 98편의 내용을 가지고 만든 찬송인데요, 9절의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이로다”를 “기쁘다 구주 오셨네”로, “온 땅이여 즐거이 노래할 지어다”를 “만 백성 맞아라” 등으로 만들고, ‘여호와’는 ‘구주’로, 여호와의 ‘심판’과 ‘임하심’은 예수님의 ‘온 세상 죄를 사하러’와 ‘오셨네’ 등으로 재해석한 것이죠. 시편과 찬송을 계속 비교해 볼까요? “만 백성 맞아라”는 “온 땅이여 즐거이 소리 칠 지어다”(98;4)의 의역이고, “이 세상의 만물들아”는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주하는 자는...(98;7-8)”의 의역인 것입니다.
ANTIOCH 곡명을 가진 이 곡은 ‘내 주를 가까이’를 작곡한 메이슨(Lowell Mason, 1792-1872)이 1836년 헨델의 오라토리오 제2부에 나오는 33번 합창 ‘문을 열라’(Lift up your head, O Ye Gates)의 첫 모티브에서 따왔다고 해서 곡명 밑에 헨델로부터의 편곡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요, 아무리 보아도 ‘문을 열라’와 이 찬송의 분위기와 느낌은 전혀 달라요. 오히려 제1부에 나오는 15곡 합창 ‘주께 영광’(Glory to God)이 더 어울려 보이는데요. 처음 부분의 테너 파트와 목자들에게 보여준 천사의 찬송 내용으로 보아서도 그렇고요. 그런데 이 찬송이 그토록 정감이 있고 많은 이들이 즐겨 부르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와 요소가 있을 것 같아요. 또 이 노래의 음표에 유난히도 즐거움과 기쁨이 흠뻑 배어 있는 것 같지요?
‘말의 색채’ 혹은 ‘어화(語畵)’라는 뜻의 ‘word painting’이란 음악용어가 있습니다. 개개의 말을 개개의 음으로 묘사해 내는 것을 말하는데요, "기쁘다 구주 오셨네"의 음 진행을 보면 "도시라솔파미레도"로 순차진행으로 하행하고 있습니다. word painting의 개념으로 해석하자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낮은 이 땅에 도시라솔파미레도 내려오셨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 백성 맞아라"와 "다 찬양하여라"에선 ‘솔라시도’와 ‘미파솔’, ‘레미파’로 상행하며 마중 나가는 것 같지 않나요? 더욱이 마지막 "다 찬양 찬양하여라"에선 ‘도도라솔파미파...’ 당김음으로 기뻐 껑충 뛰어 맞는 것 같고요.
촛불이 든 등불을 들고 곤히 잠든 새벽을 깨우는 새벽 송의 마지막 노래는 언제나 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이지요. 그리고선 성탄 인사를 나누지요.
“메리 크리스마스!”
2005. 12. 28
312장, 묘한 세상 주시고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1620년 메이플라워를 타고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 120명이 고생 끝에 첫 추수한 곡식으로 감사예배를 드리고 원주민들과 함께 칠면조 요리를 나누어 먹으며 온종일 잔치를 벌였다고 하는데, 그 날이 11월 넷째 목요일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1864년 링컨 대통령이 추수감사절로 제정해서 오늘까지 지켜오고 있는데요, 우리나라도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11월 셋째 주일을 많은 교회에서 추수감사절로 지켜오고 있고, 토착화운동의 맥락에서 추석을 전후하여 지키는 교회도 더러 있습니다.
찬송가 312장 ‘묘한 세상 주시고’는 우리가 받은 감사의 조건들로만 나열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세상, 하늘, 하나님의 사랑, 이웃 사랑, 양육해 주심, 산, 들, 초목, 달, 별, 눈, 귀, 맘과 뜻의 합함, 조화, 부모, 자녀, 형제, 자매, 친구, 교회, 봉사, 사랑 행함, 주님의 오심, 평화와 기쁨 주심 등 우리 찬송엔 24가지쯤 감사의 조건을 나타내고 있는데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우리 찬송에선 1-2절은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드리는 감사, 3-4절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드리는 감사, 5-6절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리는 감사 등 감사의 조건을 조목조목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알고 계시죠? 하나님께서 두 천사에게 바구니를 들려 세상에 내려 보냈습니다. 한 천사에게는 ‘감사’의 바구니를, 또 한 천사에게는 ‘기원’의 바구니를 들려서 말입니다. ‘기원’의 바구니를 든 천사는 바구니가 무겁도록 하나 가득 차 하늘나라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오르락내리락 했는데, ‘감사’의 바구니를 든 천사는 하루 종일 다녀도 빈 바구니 채여서 힘없이 하나님 앞에 돌아왔다지요. 바로 이 스토리를 알고 있는 이 곡의 작사자인 피어포인트(Folliott S.Pierpoint, 1835-1917)는 감사한 내용으로만 찬송을 써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1864년 봄, 그의 고향인 바드(Bath) 근처에서 아름다운 정경에 매료되어 있던 중에 비로소 이 찬송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찬송 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을 일일이 돌보신다는 내용의 시편 104편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원래 7음절 6행시로서 8절까지의 찬송입니다.
피어포인트는 영국의 광산 지역인 바드 출생으로 켐브리지의 퀸즈대학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했으며, 서머셋셔 대학에서 고전문학 교수로 봉직하였습니다. 그가 지은 찬송이 우리 찬송가에는 이 한 편뿐이지만 그의 작품들은 오비쉬플리(Orbyshiply)가 편찬한 고교회파(High Church)의 성찬용 찬송가집 ‘Lyra Eucharistica’와 닐(J.S.Neale)의 찬송가(The Hymnal Noted, 1851)에 발표되었습니다. 많은 찬양대에서 애창되고 있는 러터(J.Rutter) 작곡 성가합창 ‘아름다운 세상’(For the beauty of the earth)은 바로 이 찬송 가사의 노래로서 다른 번역입니다.
찬송가의 고유한 멜로디를 곡명(tune name)이라고 하는데, 이 찬송의 곡명은 ‘DIX’로서 우리 찬송가에는 영문고딕체로 운율 앞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딕스는 ‘고금 찬송가’(Hymns, Ancient & Modern,1861)에서 이 곡을 처음 사용한 윌리엄 딕스(William Dix)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습니다. 이 곡의 작곡자는 독일의 오르가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케헬(Conrad Kaecher, 1786-1872)입니다. 그는 옛 전래 곡조를 채집, 정리하고 편곡하는 일과 특히 16세기 팔레스트리나(G.P.da Palestrina)의 음악의 연구에 열중했습니다.
저는 몇 해 전부터 교회에서 지키는 매 감사절 때마다 감사헌금 봉투를 놓고 한 해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감사한 일들을 두루 생각하면서 꼽아가며 열 개쯤 적어보곤 합니다. 저는 금년에도 제일 첫 번째로 감사한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금년에 받은 감사의 조건들을 하나하나 생각해가며 찬송해보면 어떨까요?
2006. 01. 04
470장, 내 평생에 가는 길
그들만의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난 후
우리는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누구에게 손해 보기 싫어하고 비난받기 싫어하고, 혹 나에게 해가 된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꼭 갚으려고 하지요. 그래서 혹 자존심이 상하면 들이대어 싸우고, 내가 꼭 이겨야 속시원해합니다. 저처럼 평생 손해 보기 싫어하고 손해가 된다 싶으면 반드시 앙갚음을 했던 메리 요아킴이라는 분은 변화되어 수사가 된 후에 그의 성격대로 하나님께 꼭 앙갚음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여, 저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제는 당신 차례입니다. 이제는 당신이 저를 십자가에 매달아주십시오” 라고. 얼마나 깊은 신앙의 경지에서 터져 나온 기도입니까? 주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들에게 주어질 십자가를 마련하고 계신 것 같아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터져 나오는 신앙간증, 그것이 참된 찬송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찬송가에는 비록 예수님과 같이 험난한 십자가는 아닐지라도 그들만의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난 후 탄생한 찬송이 참 많이 있습니다.
이 찬송가의 작사자인 스패포드(Horatio Gates Spafford, 1828-1888)란 분은 미국 태생으로 변호사였습니다. 시카고 의대에서 법의학을 강의하는 교수이기도 했고, 시카고 교회에서 평신도로서 충성스럽게 봉사하는 신자이고, 복음전도자였습니다.
찬송가의 오른쪽 위 470장이라 쓰여 진 밑에 곡명이 ‘빌 드 아브르’(VILLE DU HAVRE)라고 쓰여 있지요? ‘타이타닉’이란 영화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호화여객선의 이름입니다. 바로 이 곡의 작사자인 스패포드란 분이 시카고의 미시간 호반에 큰 호화별장을 짓고 살았는데 그 유명한 시카고 대 화재로 인해 집을 잃게 되었어요. 상심한 마음을 달래고자 아내와 함께 네 딸들을 데리고 위로 여행을 떠나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무디교회도 법정관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디교회도 다 타버려서 그 잔무를 처리하느라고 다섯 식구만 먼저 보냈습니다.
1873년 11월 15일, 그의 가족이 탄 프랑스의 초호화 여객선 ‘빌 드 아브르’호는 항해를 하다 그만 영국 여객선과 정면충돌해서 226명의 희생자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 때 구사일생으로 아내만 살고 네 딸을 몽땅 잃게 되었습니다. 연속적인 재난이 꼭 욥의 시련과도 같았습니다. 스패포드는 절망 가운데 땅을 치며 통고도 해보고, 하나님을 향해 삿대질을 해가며 원망도 하다가 살며시 찾아드는 주님의 위로를 느끼며 차츰 안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아내가 요양하고 있는 웨일즈로 배를 타고 찾아가게 되었는데, 바로 그 자식을 앗아간 바다를 지나가면서 “내 영혼이 평안하다”는 이 찬송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 곡의 작곡자는 너무나도 유명한 미국의 찬송작가이죠? 블리스(Philip Paul Bliss, 1838-1876)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부흥사 무디에게 발탁되어 많은 찬송 시를 쓰고 찬송곡조를 쓴 위대한 음악 전도자입니다. 이 찬송가는 작사자 스패포드가 직접 블리스에게 가사를 주어 부탁해서 작곡하였다고 합니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 파도를 가르며 순탄하게 미끌어지는 듯한 순차적인 멜로디의 진행이 주님 안에서 거리낌이 없는 즐겁고 평안한 삶을 나타내는 듯 합니다. 특히 후렴에서 ‘내 영혼 평안해’는 우리 평생에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영혼의 안식을 누리는 듯 정적(靜的)인 동음진행(同音進行)으로 표현되었고, 마지막 ‘내 영혼 내 영혼’은 주님을 향하여 성화(聖化)하여 ‘평안해’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의 품에 안착하는 듯 상행(上行)하는 도약진행(跳躍進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블리스도 아내와 함께 여행하던 중 열차 화재 사고로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는데요, 아내가 빠져 나오지 못하자 다시 구하러 들어갔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블리스의 찬송은 우리 찬송가에 11곡이나 수록되어 있는데요, ‘속죄하신 구세주를’(35장)은 작사만 한 찬송이고, ‘내 너를 위하여’(185장), ‘주의 말씀 듣고서‘(379장)는 작곡만 한 찬송이며, ‘온 세상이 어두워 캄캄하나’(95장), ‘할렐루야 우리 구주’(159장), ‘주의 확실한 약속의 말씀 듣고’(201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235장),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241장), ‘듣는 사람마다 복음 전하여’(257장), ‘하나님의 진리 등대’(276장) 등은 작사 작곡한 찬송들입니다.
‘안네의 일기’를 쓴 저 유명한 안네 프랑크는 다락방에 숨어살면서 가족들에게 매일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Am I Happy?”. 그 지옥과 같은 삶 가운데서도 자신의 행복을 확인한 것이죠. 이 찬송가사와도 같이 ’평화롭든지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간에 “Am I Happy?” 하며 그리스도가 주신 평화를 확인하고, 소중히 간직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2006. 01. 12
408장,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은혜의 망망대해로 마음껏 저어 나아가면
저는 어렸을 적, 강과 가까운 곳에 살았으면서도 친구들처럼 헤엄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어른들이 위험하다고 강에 가지 못하게 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워낙 소심하고 겁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강이나 바다를 좋아하기는 하는데 물에 깊이 들어가진 못하고 그저 물가를 거닐거나 전망 좋은 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든지 합니다. 무척 불행한 셈이지요.
언젠가 친구를 따라 배를 얻어 바다낚시를 해본 적이 있는데요, 깊은 바다에 가니까 제법 큰 물고기들이 무척 많이 잡히더군요. 횟집에서나 비싼 돈을 주고 먹어보던 큰 물고기들을 내 손으로 직접 잡아, 온 식구와 여러분이 함께 실컷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기분이 보통이 아니던데요.
이 찬송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 보다 깊다” 노래를 시작하다 보면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 절로 생겨날 것입니다. 악보 경치를 한번 보십시오. 음표의 높낮이를 따라 곡선을 그려보면 넘실거리는 웨이브를 느끼게 되지요? 높은 음은 물결이 높고 낮은 음은 물결이 낮고...
1절에서는 그 옛날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시몬의 배에 올라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시던 음성도 들려오는 듯 하고, 2절과 3절에선 파도치는 바다와도 같이 인생살이에서의 크고 작은 파고(波高)를 보게도 되며, 4절에선 그 파고를 오히려 기회로 여기며 즐기라는 여러 가지 광경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겉에 나타난 파도만을 보고 그 바다 밑의 무궁무진한 고기떼를 보지 못하는 눈 어두운 우리를 향해 은혜의 “깊은 데로 가라” 명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이렇듯 음표에는 우리가 이해할 만큼의 상징이 들어있는데요, 1-8마디와 13-16마디의 높낮이가 파고의 곡선이었듯이 후렴의 “언덕을 떠나서”에서 언덕은 정말 높은 언덕처럼 음이 높고, “창파에 배 띄워”는 겁먹은 얼굴로 구경만 하던 언덕에서 내려와 배를 띄우듯 음이 낮습니다.
이 찬송은 캐나다 계 미국인인 심프손(Albert Benjamin Simpson, 1848-1919)목사님이 1891년에 작시한 것입니다. 심프손 목사님은 1865년 캐나다 토론토의 낙스 대학을 나온 장로교 목사님으로 1874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여러 장로교회에서 시무했는데 특히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관심을 가진 분으로 유명합니다. 캠프를 통하여 성경공부와 지도자를 육성하는 운동을 창안하여 가정과 직장, 병원, 형무소 등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설립한 국제선교협회(The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인 CMA는 지금까지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심프손 목사님이 작사하신 찬송은 우리 찬송가에도 다섯 편이나 실려 있는데요, 이 찬송 외에 “어저께나 오늘이나”(133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456장),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498장), “네 병든 손 내 밀라고”(530장) 등 아주 은혜로운 찬송들이지요.
배를 물에 띄운다는 뜻의 LAUNCH OUT이란 제목을 가진 이 곡을 지은 분도 목사님인데요, 작곡자 카터(Russell Kelso Carter, 1849-1926)목사님은 미국 매릴랜드 주의 볼티모어(Baltimore) 태생으로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육사 교수로 화학과 자연과학, 그리고 토목공학과 고등수학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후에 감리교 목사가 되어 캠프 집회도 인도하였고 성결운동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체육을 비롯하여 많은 재능을 가진 목사님인데요 음악은 독학으로 공부해서 당대 찬송가 작곡가로도 이름을 날렸다고 합니다.
이 찬송가 윗 편에 보면 작사자와 작곡자 이름 옆에 작사 작곡 연대가 표기되어 있는데요, 1891년으로 되어 있지요? 심프손 목사님과 카터 목사님이 공동으로 편찬한 ‘성도의 생활 찬송가’(Hymns of the Christian Life)가 출판된 해가 1891년이고요, 이 책에 카터 목사님의 찬송이 52편이나 수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이 찬송과 그가 작사 작곡한 “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 서”(399장) 등 두 편이 실려 있습니다.
대대로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는 일을 생업으로 삼아온, 그야말로 바다와 고기잡이에 있어서 전문가라면 최고 전문가인 베드로였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저어 나가 많은 물고기를 잡았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믿고 순종하여 은혜의 망망대해로 마음껏 저어 나아가면 어떨까요?
2006. 01. 21
434,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주님이 마련해 주신 내비게이션
저는 일 년에 수십 회, 세미나를 인도하러 전국 여러 곳을 다닙니다. 전화로 날짜와 시간을 정한 뒤에는 팩스로 약도를 받아 찾아가곤 하는데 가끔 약도를 받지 못하거나 찾기 쉽다고 전화로 장소를 알려 주었을 때에는 장소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운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한 번은 교회를 찾지 못해 그 주위를 뱅뱅 돌다가 집회시간에 늦게 도착하여 많은 교인들이 준비찬송만 삼십분쯤 부르게 한 적도 있고요, 핸드폰이 나오기 전인 오래 전엔 길을 헤매다 두 시간쯤 지난 뒤 아예 집회가 끝난 다음에 도착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요, 이런 일 때문에 얼마 전 제 차에 내비게이션을 달았습니다. 엊그제에도 멀고 생소한 곳에 있는 어느 교회에 찾아가게 되었는데요, 목적지를 입력하니까 “계속 직진 하십시오”, “5백 미터 전방에서 우회전 하십시오”하면서 길을 알려주고, 혹 그 곳을 지나칠라치면 “경로를 재탐색 합니다”하면서 다시 친절하게 길을 알려 줘서 목적지에 딱 도착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지요. 우리 앞길에 주님께서 부착해 주신 내비게이션, 곧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해 주심 따라 그대로 행하면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가 형통하지 않겠습니까?
이 찬송의 작사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여성 찬송작가인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1820-1915)입니다. 8천여 편의 찬송시를 남긴 그는 “만일 내가 육신의 눈을 떠서 세상 것들로 장애를 받았다면 어떻게 그 많은 찬송을 지을 수 있었을까요?”라고 간증하고 있는데, 비록 육신의 눈은 멀어 앞이 캄캄했지만 오히려 그 장애로 인해 오히려 영혼의 눈은 밝아 우리가 밝히 볼 수 없는 주님을 더욱 가까이 만날 수 있었던 것 아니었겠나 생각됩니다.
크로스비는 미국 뉴욕 주의 퍼터남 카운티(Putunam County)에서 태어났는데요, 갓난이 때 열병 치료를 잘못해서 장님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덟 살 때부터 시를 썼다고 하는데, 맹인학교에 다니면서 시와 음악에 재능을 보여 그 때부터 유명했다고 합니다. 졸업 후 모교인 맹인학교에서 십여 년 간 교사로도 봉직했는데요, 그곳에서 동료 음악교사인 알스타인(A. V. Alstyne)과 만나 서로 도우면서 많은 찬송을 작곡했습니다. 물론 그의 남편도 맹인이었습니다. 그는 95세 평생을 살면서 8천여 편 찬송을 썼는데요, 우리찬송가에는 30대 중반인 1875년에 지은 이 찬송을 비롯하여 무려 24편이나 실려 있습니다.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43장), ‘찬양하라 복되신’(46장), ‘예수 나를 위하여’(144장), ‘언제 주님 오실는지’(163장), ‘너희 죄 흉악하나’(187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204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219장), ‘주가 맡긴 모든 역사’(231장), ‘저 죽어 가는 자’(275장), ‘’후일에 생명 그칠 때‘(295장), ‘예수께로 가면’(300장),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321장), ‘주께로 한 걸음씩’(323장), ‘인애하신 구세주여’(337장), ‘군기를 손에 높이 들고’(385장), ‘나의 생명 되신 주’(424장), ‘오 놀라운 구세주’(446장), ‘주 예수 넓은 품에’(476장), ‘기도하는 이 시간’(480장), ‘나의 영원한 기업’(492장), ‘십자가로 가까이’(496장), ‘주의 십자가 있는데’(501장), ‘주와 같이 되기를’(508장) 등이 있습니다. 너무나 좋아하는 찬송들이죠?
크로스비의 찬송은 도온, 로우리, 커크패트릭, 내프, 스웨니 등의 복음성가 작곡가들의 곡과 짝지어져 있는데요, ALL THE WAY란 제목의 이 곡조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 태생인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목사님이 1875년에 작곡한 것으로 보아 크로스비의 가사를 직접 받아 작곡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로우리 목사님은 루이스버그(Lewisburg)와 버크넬(Buchnell)대학에서 공부했고, 목사가 되어 뉴욕 등 여러 곳에서 목회도 하였고, 모교인 버크넬 교회에서 강의도 했습니다. 40대에 들어서서야 찬송가를 작사하고 작곡 했다고 하는데요, 그 후 세상 떠날 때까지 30여 년간 많은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이 찬송을 비롯하여 10편이나 실려 있습니다. ‘무덤에 머물러’(150장), ‘주 사랑하는 자’(249장), ‘성자의 귀한 몸’(356장),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401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434장), ‘주 음성 외에는’(500장) 등은 그가 작곡한 찬송이고, ‘나의 죄를 씻기는’(184장),‘여러 해 동안 주 떠나’(336장), ‘울어도 못 하네’(343장), ‘나 위하여 십자가에’(403장) 등은 작사도 하고 곡도 붙인 찬송들입니다.
이 찬송에서 매우 감동적인 가사는 1절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라는 부분과 2절에서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입니다. 엘리야가 광야에 쓰러져 있으면서도 “만족 합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 역시 몸에 가시가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만족하다고 했고요. 너무도 높은 신앙의 경지에서 우러나온 가사이지요. 그 뿐입니까? 이어서 반석에서 넘치는 생명수로 쏟아 부으시는 은혜가 더욱 그렇고요, 더욱 감동을 주는 대목은 영원히 부르는 우리의 찬송인도자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죠. 어떻습니까? 주님이 마련해 주신 내비게이션,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라 나설 준비가 되었습니까?
2006. 01. 26
273, 저 북방 얼음산과
복음은 바람 따라 퍼지며, 물결 따라 전해진다
저는 년 초에 국립합창단과 더불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연주 차 다녀왔습니다. 그 곳 동방교회인 러시아 정교회에선 크리스마스를 우리 서방교회와 달리 1월 7일에 지키기 때문에 저희들로서는 크리스마스를 두 번 보내게 된 셈이죠. 우리 서방교회에선 교회력을 율리우스력을 쓰고, 동방교회에선 그레고리력을 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해 예술의 전당에서 연주했던 크리스마스 음악을 그 곳 주 정부 오케스트라 반주로 연주를 했는데요,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요.
얼마 전 냉전 시절 같았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 아닙니까? 살벌한 이념으로 가득한 군가나 연주하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크리스마스 찬송들을 즐기며 기뻐 연주하니 말입니다. “죄인들을 불러서 거듭나게 하시고 영생하게 하시니 왕께 찬양 하여라” 부분에선 갑자기 가사에 은혜가 되어 감격의 눈물을 참느라 힘들었습니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춥고 가난한 땅, 이곳까지 주님이 가라고 명하신 땅 끝이로구나 생각해 보며 ‘저 북방 얼음산’ 이 찬송이 떠올랐습니다.
찬송 악보 왼쪽 아래를 보면 ‘저 그린랜드 얼음산으로부터’(From Greenland''s icy Mountain)라고 쓰여 있지요? 이 찬송의 작사 작곡자는 모두 유명한 분들인데요, 이 찬송이 태어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왼쪽 윗 단에 1819년이라 밝히고 있는데, 작사자인 히버(Reginald Heber, 1783-1826)목사의 장인인 쉬프리 목사와 여러 명이 바로 그해 5월 30일을 해외선교주일로 정하고 그 전날 모여 회의를 하던 중, 마침 동석한 히버 목사에게 적당한 찬송을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히버 목사는 그 자리에서 4절까지 지어내 이튿날 주일예배 때 당시 유행하던 ‘베거스오페라’(beggar’s opera)에 나오는 선율에 맞추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히버는 영국 쳬셔(Cheshire) 출신의 영국 국교회 목사입니다. 아버지도 목사님이었는데 어려서부터 시작(詩作)에 재능을 보였고, 옥스퍼드 대학 재학시절에 장시(長詩)를 써서 당대 최고의 뉴디게이트(newdigate)상을 받을 만큼 뛰어났다고 합니다. 호드넷(Hodnet)라는 작은 마을에서 목회를 시작해 이 후엔 감독까지 되었는데요, 그의 찬송이 우리 찬송가에 4편이 들어 있습니다. 이 찬송을 비롯해서 모든 찬송 중 최고의 찬송인 ‘거룩 거룩 거룩’(9장)과 ‘실로암 샘물가에 핀’(298장), ‘주 예수 우리 구하러’(398장) 등이 그것입니다.
작곡자 메이슨(Lowell Mason, 1792-1872)은 너무나 잘 아시죠? ‘내 주를 가까이’의 작곡자이고 미국 최초의 음악박사 말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베거스오페라의 선율에 맞춘 이 찬송이 ‘복음지’(1821.7월호), ‘크리스챤 옵서버’(1823) 등 여러 잡지에 실렸을 때 때마침 죠지아주 서바나에 사는 하워드(Mary Howard)란 자매가 이 찬송에 큰 은혜를 받고 같은 교회의 음악감독이던 메이슨에게 부탁하여 MISSIONARY HYMN이란 제목의 이 곡조를 탄생케 했습니다.
이 찬송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지구본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북미 북동부에 위치한 그린란드의 얼음 섬도 보이고, 오대양에 펼쳐진 크고 작은 섬들, 육대주에 솟은 험한 산지와 사막, 온갖 잡신과 우상들이 득실거리는 지구 곳곳이 한 눈에 들어오지요? 그 곳에 사는 여러 나라, 어두움의 여러 민족들이 아수성대며 “어서 와서 빛을 비쳐주세요” “어서 와서 우릴 구원해 주세요”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1절의 요지입니다. 그리고 2절은 제자인 우리로서의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시면서 부탁하신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라고 하신 말씀 말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는 이 말씀을 행하기 위해 우리의 체력과 시간과 물질을 모두 드리자고 다짐합니다. 선교지에 직접 가서 봉사할 분은 온 몸으로, 그리고 먼 곳에서 그들을 물질로 후원하실 분들은 기도와 헌금으로 도울 것을 권합니다. 3절은 더욱 재미있는데요, 시적이면서 시각적인 표현이죠. 주님의 복음은 바람 따라 퍼지며, 물결 따라 전해진다는 것인데 바람 닿는 곳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며, 바다 물결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러시아 방문 기간 중 저는 그 곳서 활동하고 계신 우리나라에서 파송된 선교사님들을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좋은 일터와 가족을 등진 채 오직 주님의 명령을 따라 동토(凍土)에 보내진 그들... 온갖 어려움이 수시로 닥치는 척박한 상황 가운데 일궈 세운 교회와 신학교, 국제학교 등을 돌아보며 주님의 나라 건설 현장을 보는 듯 했습니다. 온 땅이 꽁꽁 얼어붙은 캄캄한 새벽, 그들의 울부짖는 기도소리도 들었습니다. 눈물로 뿌린 복음의 씨앗이 결국엔 언 땅을 녹여 크게 열매 맺으리라 확신하며 소망의 그 날을 그려보았습니다.
2006. 02. 07
9장, 거룩 거룩 거룩
찬미의 내용이 없는 찬송은?
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미국에 유학을 가 신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매일 예배를 드리며 찬송을 부르는데 자기가 아는 찬송을 한 장도 안 부르더라는 거예요. 그가 아는 찬송도 거의 미국 곡인데 말이죠. 하도 궁금해서 룸메이트에게 물어 보았답니다. “이 학교에선 내가 아는 찬송을 왜 한 장도 안 부르지?”라고요. 그랬더니 친구가 되물었답니다. “너희 한국에선 무슨 찬송을 부르는데?”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죠.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울어도 못 하네’ ...” 그랬더니 그는 껄껄대고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이 사람아, 그 건 찬송(hymn)이 아니고 복음가(gospel song)야.”라고요. 갑자기 헷갈리죠? 우리가 잘 아는 찬송들이 찬송가에 다 들어있는 데 찬송이 아니라니요?
초기 기독교의 지도자인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이 말한 찬송의 정의를 소개할까합니다. 그는 찬송이란 찬미하는 노래로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인데 그 중 한 가지만 빠져도 찬송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찬미’, ‘노래’, ‘하나님께 드려짐’을 가리켜 흔히 ‘찬송의 3요소’라 일컫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거스틴의 찬송의 3요소 중 첫 번째 요소인 ‘찬미’를 중심으로 예배찬송인 이 찬송과 복음가인 ‘울어도 못 하네’(343장)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울어도 못 하네’의 가사에선 찬미의 내용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혹 나타날까하여 끝까지 불러 봐도, 후렴에 “나를 구원 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라든지, “4절에서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로 끝났지, 감사하다든지, 영광을 돌린다든지 하는 찬미의 내용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노래는 ‘찬송’(hymn)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찬송을 보세요. 처음부터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 합니다”하지 않습니까? 찬송, 경배, 감사, 찬미, 영광, 존귀 같은, 드리는 내용이 있어야죠. 즉 찬송가는 예배 적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가는 예배의 내용보다 복음적인 데 비하여) 우선 이 정도 해 놓고 이 찬송에 대하여 살펴보죠.
곡명 NICAEA는 소아시아 비누니아 지방애 있는 지금의 이즈닉의 옛 도시이름인데, 그 곳에서 열렸던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 1차는 325년, 2차는 787년)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니케아신조’(Nicaea Credo)를 채택한 이 공의회에선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본질성)란 단어로 표현하고 삼위일체론을 확고히 하였지요. 그런 의미에서 제목만 보고서도 이 찬송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귀한 찬송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찬송은 멜로디를 보나 시로 보나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노래를 시작하면서 음이 계단처럼 한 층, 한 층 올라가죠? ‘도도 미미 솔솔’하면서... 이는 하나님의 존전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씩 올라가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데요, 이 역시 음화(音畵, word painting, 115장 참조)로서 음의 상징(tone symbol)이라 볼 수 있습니다. ‘도 미 솔’하며 계속해서 오르면 제일 높은 정점은 어디이겠습니까? 네 째단 첫 소절을 보면 우리 가사에서 ‘성삼위 일체’의 ‘성’자가 제일 높은 음인데, 영어 원문 가사의 ‘God in three Persons’에서 ‘God’에 이르는 것입니다. 위 음 ‘도’의 그 높은 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오른 것이죠.
그 뿐만이 아닙니다. 가사를 살펴보면 ‘거룩 거룩 거룩’ 하는 처음 시작 부분도 요한 계시록 4장 8절 말씀인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의 영어 성경 본문을 “Lord God Almighty"라고 찬송 시에 그대로 인용되고 있어 더욱 성경적이어서 은혜롭고요, 이 찬송이 지닌 문학적인 아름다움도 빼 놓을 수가 없습니다. 영어찬송을 불러보면 금방 느낄 수 있는데요, 영어찬송 가사에서 4째, 8째, 10째, 12째, 16째 마디 모든 끝 음의 발음이 ‘이’(i)모음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주 단어인 ‘Holy’는 물론이고, ‘Almighty’ ‘Thee’ ‘see’ ‘sea’ ‘seraphim’ ‘Mighty’ ‘Trinity’ ‘be’ ‘purity’등 모두 ‘이’모음으로 끝나죠? 운(韻, rhyme)이 착착 맞아 들어가 시를 더욱 아름답게 합니다. 각 행의 처음 시작하는 패시지도 마찬가지인데, ‘Holy’ ‘Lord’ ‘All’ ‘Tho''''’ ‘Early’ ‘Only’ ‘God’ ‘Perfect’ 같은 단어로 거의 ‘어’모음으로 되어 있지요. 이런 시적 감흥을 우리말로 옮기기는 절대 불가능하지요.
3절에서 “모든 죄인 눈 어두워 보지 못 하네” 하는 대목은 하나님의 숨결을 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천국의 이 귀한 장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면류관을 쓰신 보좌 위의 주님과 천군천사들과 수많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아름다운 찬송소리도 들리지 않겠죠.
이 찬송 시를 쓴 히버(Reginald Heber, 1783-1826)의 찬송은 273장, 298장, 398장, 그리고 작곡자인 다익스(John Bacchus Dykes,1823-1876)의 찬송은 59장, 81장, 85장, 129장, 140장, 429장, 477장, 508장이 우리 찬송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2006. 02. 13
343장, 울어도 못하네
오직 주님을 믿고 돌아오는 것만이...
지난주에 어거스틴의 찬송의 3요소에 대하여 말씀드렸는데, 첫 번째 요소인 ‘찬미’(praise)의 내용에 대하여 9장 찬송과 이 찬송을 비교한 바 있지요. 찬송한다든지, 감사하다든지, 영광을 돌린다든지 하는 찬미의 내용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이 노래는 찬송(hymn)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복음가(gospel song)는 예배찬송과는 달리 주님과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주님께 돌아오길 설득하는 노래이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찬송가의 내용이 찬송, 경배, 감사, 찬미, 영광, 존귀 같은, 드리는 내용, 즉 예배적인데 비해 복음가는 십자가, 피, 용서, 부르심, 영접, 회개, 사죄, 구원 등이 주 내용인 복음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독립전쟁을 전후해 극도로 죄악이 극심하던 때에 때마침 일어난 매사츄세츠 중심의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 그리고 이 후 서부 켄터키에서의 대부흥운동(Great Revival)이 일어나는데, 이 부흥집회에서 불려지는 새로운 장르의 노래들은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게 됩니다. 교회에서 그 이전까지는 밋밋한 시편가를 불렀었거든요.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나 맥그리디(James McGready, c.1760-1817), 그리고 이 후에 무디(Dwight L.Moody, ) 같은 대부흥사들은 문학과 음악에 재능을 가진 많은 동역자들을 모아들여 복음화 운동에 적극 활용하였던 것이죠. 1830년경 미국에서 애팰래치아 산맥을 넘은 인구가 무려 미국인구의 1/3 가량이나 된다는 기록이 있는데, 미국 서부 개척의 대열에 이러한 산야집회(camp meeting)와 그에 어울리는 새로 나타난 복음가로 인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찬송가 위쪽을 보면 왼쪽과 오른쪽에 작사자이름과 작곡자 이름이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라고 써있고, 작사 작곡 년대도 1867년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모두 똑 같죠? 로우리 목사님이 작사도 하고 작곡도 한 찬송입니다.
로우리 목사님에 대해선 ‘나의 갈 길 다 가도록’에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고, 루이스버그(Lewisburg)와 버크넬(Buchnell)대학에서 우등으로 졸업했다고 해요. 1845년 목사가 된 후에 뉴욕 등 여러 곳에서 목회도 하였고, 모교인 버크넬 교회에서 강의도 했는데 1875년엔 이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도 받았습니다.
마흔에 들어서면서부터 뒤늦게 창작열이 솟아나 찬송가를 작사하고 작곡 했는데요, 그 후 세상 떠날 때까지 30여 년간 많은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이 찬송을 비롯하여 10편이나 실려 있습니다. ‘무덤에 머물러’(150장), ‘주 사랑하는 자’(249장), ‘성자의 귀한 몸’(356장),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401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434장), ‘주 음성 외에는’(500장) 등은 그가 작곡한 찬송이고, ‘나의 죄를 씻기는’(184장),‘여러 해 동안 주 떠나’(336장), ‘울어도 못하네’(343장), ‘나 위하여 십자가에’(403장) 등은 작사도 하고 곡도 붙인 찬송들입니다.
로우리 목사님은 목회를 잘 하셨다고 하는데, 특히 설교가 뛰어났나 봅니다. 이같이 많은 찬송을 남긴 그가 찬송가작가보다는 설교자로 기억되길 바랐다고 하니까요. 이 찬송가에는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이 부제로 붙어 있는데요,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찬송에서 보듯이 아무리 몸부림치고 애써보아도 그 어떤 이 세상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으며, 오직 주님을 믿고 돌아오는 것만이 그 해결 방법임을 알려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때로 삶의 의미를 잃고 한강 다리를 오가며 한숨만 쉬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속삭입니다. “죽고 싶지? 울고 싶지?”하며 우리의 처지를 너무도 잘 알아 통사정을 들어주고 위로해 주는 다정스런 목소리...
이 모진 세상을 살면서 힘쓰고, 애쓰며, 참다못해 우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닥아 오셔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돌아가신 주님, 그 분을 소개해주겠다며 그 분에게만 행복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우리로선 그리도 힘들었던 그 어렵고 힘든 문제들이 주님을 만나 믿고 따르기만 하면 다 풀리게 될 것이라고 말이죠.
WEEPIHG WILL NOT SAVE ME로 시작되는 이 곡명의 이 찬송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도 좋아합니다. 곡조가 다분히 국악적이죠. 서양음계 중 ‘파’와 ‘시’가 빠진 ‘도레미솔라’ 다섯 음으로만 되어 있어 예부터 할머니들이 즐겨 했지요. 국악기 반주로 추임새까지 곁들여 부르면 영락없는 우리가락이죠. 후렴에 있어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에선 음이 높죠? 마치 우리 앞에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계신 듯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노래 진행이 울음소리 같아요. 이 찬송을 1절부터 부르노라면 3절까지 답답하다가 4절을 부를 때면 신이 나고, 시원합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통곡이 변하여 잔치 자리가 되니까요.
2006. 02. 23
33장, 온 천하 만물 우러러
창조하신 피조물을 바라보며 “찬양하라”고...
저는 가끔 성가대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프린트된 악보 상에서 중요치 않은 것이 없겠지만, 만약 덜 중요한 것부터 하나씩 버려야 된다면 무엇을 택하겠느냐고요. 먼저 페이지 숫자, 제목분류, 영어찬송 첫 가사, 관련, 성구, 제목, 빠르기 말, 곡명, 작사 작곡자 등 차례대로 덜 중요한 순서대로 다 떼어 버리고 덩그러니 가사와 악보만 남았다고 해 봅시다. 이제 가사와 노래 중 하나만 택하라면 어느 것을 버려야 할까요? 그럴 리야 없겠지만 정 버려야 한다면 가사를 남겨두고, 노래를 버려야 하겠지요. 이만큼 노래보다 가사가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음악보다 노래하는 마음을 더 좋아하십니다.
우리는 몇 주부터 성 어거스틴이 정의한 ‘찬송의 3요소’(‘찬미’, ‘노래’, ‘하나님께 드려짐’)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는데, 이번엔 둘째요소인 ‘노래’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노래는 노랫말인 가사와 곡조로 되어 있지요? 그 중 가사의 내용을 가지고 생각해 보도록 하죠. 하나님께 드리는 언어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글을 쓸 때에도 위 어른들께 보낼 때면 경어(敬語)로 좋은 어휘를 선택해서 바른 글씨로 쓰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은 어떨까요? 성경에 나타난 모든 노래들은 아름다운 시로 되어 있습니다. 150편의 시편은 물론이고, 누가복음에 나오는 송가(頌歌, canticle)를 비롯해 ‘모세의 노래’, ‘한나의 노래’, 사도 요한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노래들이 훌륭한 시인 것입니다.
‘시’(詩)란 한자를 보십시오. 말씀 ‘언’(言)변에 절 ‘사’(寺)자로 되어있지 않습니까? 말로서 절을 짓는다는 뜻인데, 감동이나 생각이 가장 간결한 언어로 표현된 아름다운 문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찬송은 아름다운 시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시인들인 셈이죠.
이 찬송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 시인가...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St. Francis of Assisi, 1182-1226)가 이탈리아 어로 쓴 시인데, 여러 나라 말로 옮겨져 우리 찬송이 되었는데도 이렇게 아름다우니 원문은 어떻겠어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 프랜시스는 젊은 시절 방탕하다가 20세 때에 회개하고 돌아와 성직자가 된 이후 기도생활과 구제사업으로 온 생을 주님께 헌신하는 삶으로 바치지 않았습니까? 가난하게 살아가며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면서 ‘형제단’ 수도원 운동을 이끈 청빈(淸貧)주의자였던 그는 주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문둥이들과도 살았고, 짐승들뿐만 아니라 벌레까지도 사랑하여 ‘동물의 수호성인’이라는 별칭을 가진 성 프란시스의 삶을 알게 된다면 이 찬송을 더욱 의미 있게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가 1225년 여름에 이 시를 지었다고 밝혀져 있는데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일 년 전인 43세 때입니다. ‘태양의 송가’(Altissimu, omnipotente, bonsignore)라는 장편 시 중에서 그 일부를 찬송 가사로 만든 것입니다. 이 때 성 프란시스는 매우 병약하여 드디어는 실명까지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탈리아의 산 다미아노(San Damiano)수도원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 심란하여 누워 있었는데요, 밝게 비치는 햇빛마저도 약해진 시력으로 인해 몹시 괴로워 그늘로 피해 다닐 수밖에 없었던가 봐요. 게다가 짚으로 엮은 벽 밑에 구멍을 뚫은 쥐가 왔다갔다 몰려다니며 그를 조롱하듯 괴롭혀댔다고 합니다. 이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다니 너무나 존경스럽지 않습니까? 아마도 쏘다니는 쥐를 보고도 “하나님을 찬양하라 할렐루야”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이 찬송은 매우 긴 절인데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에서 첫 째 날부터 하루하루 날이 바뀔 때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보며 감탄하여 천사들이 창조의 업적을 찬양하듯 노래하고 있습니다. 처음의 1절과 2절은 해와 달, 바람, 구름, 노을 등 하늘과 우주의 모든 것들을, 3절과 4절은 물과 불, 땅과 꽃, 나무들과 열매 등 땅위의 모든 것들을, 5절과 6절은 최고의 마스터피스인 인간들에게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찬송의 곡조인 LASST UNS ERFREUEN은 원래 부활절 찬송 곡조인데, 표기된 것과 같이 1623년 꼴로녜(Cologne)판인 ‘교회찬송가’(Geistliche Kirchengesang)에 성 프란시스의 가사가 붙음으로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이 곡조는 처음부터 ‘도레미파솔’로 상승하여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을 향해 우러러 찬양하게 하며, 마지막 세 번의 ‘할렐루야’는 다시금 ‘도시라솔파미레도’로 하강 순차진행을 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한 몸에 받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합니다. 멜로디뿐만 아니라 화성도 뛰어나 찬송가의 보물 중의 보물인 것입니다.
2006. 03. 06
331장, 나 주를 멀리 떠났다
되찾은 아들
TV에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란 프로가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집을 나가 방황하며 살다가 오랜 세월을 보낸 뒤 수십 년 만에 부모님을 찾아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함께 눈시울을 적시곤 합니다.
혹시 어렸을 적에 가출해 본 적이 있습니까?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하기도 싫고, 어른들의 잔소리도 짜증이 나고,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없고, 따분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무작정 부모님을 떠나 방황한 경험이 있는 분들은 더욱 실감이 날 것입니다. 집을 떠나니까 어떻던가요? 그토록 재미있던 죄악 된 행위들이 나중엔 지겹고 후회스럽지 않던가요?
지나고 나니 그 귀한 세월을 어느덧 다 허송 했구나 한탄하진 않았나요? 부모님의 사랑으로 그래도 행복했던 옛날이 그립진 않았나요? 허랑방탕한 생활로 마음에 병이 생기진 않았나요? 어느 순간마다 얼핏 부모님의 말씀이 떠오르고 그 때마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겠지요.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유명한 이야기인 ‘되찾은 아들’이 바로 이 찬송의 주제이고, 그 상황들을 자세히도 고백하고 있습니다. 돌아가기로 마음을 바꾼 순간 그 즉시 힘이 솟죠? 소망이 생기죠? 그리고 달려가 “이제 옵니다.” 용서해주시고 “맞아 주소서”하며 주님 품에 안기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회개의 노래입니다.
우리는 몇 주 전 18회부터 성 어거스틴이 정의한 ‘찬송의 3요소’(‘찬미’, ‘노래’, ‘하나님께 드려짐’)에 대하여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데, 그 둘째요소인 ‘노래’에 대하여 생각해 보던 중 노랫말인 가사에 대하여 찬송가(Hymn)와 복음가(Gospel Song)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지난 회(33장)에서 찬송은 문학적으로 가치가 높은 가사이어야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시이어야 하지요. 그런데 이 찬송과 같은 복음가는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모르거나 떠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하기 때문에 더욱 더 실감나는 말, 이해하기 쉬운 말인 구어체(口語體)로 되어 있습니다. 또 복음은 교양이 높은 사람에게도 필요하겠지만 못 배운 사람, 힘이 없는 사람, 병든 사람 등 모든 대중들에게 전해져야겠기에 그 전해지는 언어도 역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만약 시인의 집에 불이 났다고 해 봅시다. 그 시인이 “오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여...” 하며 아름다운 언어를 구사하여 시를 짓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아니죠. “불이야” 소리치며 달려 나오겠지요. 이것이 복음의 긴급성이랄 수 있는 것입니다.
노래 위쪽에 8585라고 씌어 있지요? “나 주를 멀리 떠났다”의 여덟 글자, “이제 옵니다”의 다섯 글자의 운율(韻律, rhyme)을 나타낸 것인데, 복음가 역시 노래를 불러야하기에 리듬에 따라 정해진 운율이 있어 최소한의 시의 형태는 갖추었을지라도 수준 높은 시라고는 할 수 없지요. 오히려 일상(日常)의 언어로 되어있기에 우리에게 뭉클하게 주는 감성적인 호소가 있습니다. 이 찬송에서 보면 “이제 옵니다” “주여 옵니다”를 반복하여 답창(答唱, responsorium)형태를 취하여 더욱 호소력이 있습니다.
곡이름 COMING HOME인 이 찬송은 미국의 유명한 찬송작곡가인 커크패트릭(William James Kirkpatrick, 1838-1921)이 작사 작곡한 작품입니다. 커크패트릭은 미국 펜실베니어 던카논(Duncannon) 태생으로 어렸을 때 학교 교사인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우고, 바이올린, 첼로, 플륫을 비롯한 관현악기를 모두 다룰 만큼 음악의 재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목재를 다루는 기술도 있어 목공소, 가구제조업 같은 일도 했었는데요, 마흔 살 때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로는 찬송가를 짓고, 책을 출판하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83세 필라델피아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100여권 이상의 찬송가를 출판했다고 하니 그의 창작력과 봉사심이 대단하죠?
커크패트릭이 작곡한 찬송가는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43장), "생명의 주여 면류관"(139장), "신랑 되신 예수께서"(162장), "이 기쁜 소식을"(179장), "먹보다도 더 검은"(213장), "기쁜 소식 들리니"(252장), "어둔 죄악 길에서"(262장),"구주예수 의지함이"(340장),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362장), "주의 사랑 비췰 때에"(414장), "오 놀라운 구세주"(446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455장),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483장),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505장) 등 열네 편과, 작사 작곡한 찬송가 한편 등 열다섯 편이 실려 있습니다.
이 찬송의 작사 작곡 년대가 1892년이라고 적혀 있지요? 이 때에 커크패트릭은 펜실베니어의 로우린스빌(Rowlinsville)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인데요, 이 집회에서 독창 순서를 맡은 성악가가 찬송은 부르면서도 불신자였다고 해요. 이를 안타까이 여긴 그는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던 중 영감을 얻어 이 찬송을 지어 그에게 독창을 맡기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찬송을 부르던 그날 저녁 집회에서 이 성악가는 자신이 주님을 떠난 죄인임을 깨닫게 되어 감격에 목이 메어 끝까지 부르지 못하고, 꼬꾸라져 울면서 회개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집니다. 음악에 깃든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게 된 것이죠.
2006. 03. 14
25장, 면류관 가지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기에...
저는 성경을 읽다가 하늘나라 광경을 상상해보고 감동한 적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늘나라 광경이 그려져 있는데, 하나님의 보좌 둘레에는 천사들이 둘러 서 있고, 앞에는 이십사 장로들과 각 지파에서 온 구원 받은 많은 무리들이 도열해 있는 웅장한 모습 말입니다.
라틴어로 ‘코람 데오’(Coram Deo)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이란 뜻인데요,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으면 이 하늘나라의 광경이 늘 펼쳐져 보이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보이고, 루터도 보이고, 지난달에 하늘나라에 가신 박 장로님도 보이고, 놀랍게도 저도 그 대열 속에 끼어 있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상상하노라면 이 찬송이 들려오지요. 보좌에 둘러선 천사들의 찬송하는 가운데 우리 삶에서 얻어진 값진 보석들을 가지고 나아가 주님 머리에 쓴 면류관에 달아드리는 것이죠.
이 찬송 시는 영국의 말덴(Malden) 태생으로 영국국교도로서 나중에 가톨릭으로 개종해 신부가 된 브리지스(Matthew Bridges, 1800-1894)가 지었습니다. 신부가 되어 3년째인 51세 때인 1851년 ‘마음의 찬송’(Hymns of Heart)집에 6절가사로 발표했는데, 1절은 ‘많은 면류관들을’(계19;12), 2절은 ‘동정녀의 아들께’, 3절은 ‘하나님의 아들께’ 4절은 ‘사랑의 주께’, 5절은 ‘평화의 왕께’, 6절은 ‘만세의 주께 면류관을 드리자’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후 알포드(Alford)의 수도원장인 트링(Godfrey Thring, 1823-1903)이 이 찬송이 좋으면서도 6절까지 면류관이 여섯 개인 것에 아쉬움을 가지고 있던 주에 ‘생명의 주님께’ 드리는 한 절을 더 지어 추가해서 7절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원래 7이란 숫자는 하늘의 숫자인 3과 땅의 숫자인 4를 합한 완전 수 아닙니까? 우리 찬송가에는 원문의 1절과 4절, 그리고 5절만을 택하여 3절만으로 간추려져 있지요. 브리지스가 지은 찬송은 우리 찬송가에 이 찬송과 ‘내 마음 주께 드리니’(380장) 두 편만이 실려 있습니다.
우리는 몇 주 전 18회부터 성 어거스틴이 정의한 ‘찬송의 3요소’(‘찬미’, ‘노래’, ‘하나님께 드려짐’)에 대하여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데, 지난주에는 그 둘째요소인 ‘노래’, 그 중에 가사를 다뤘는데요, 오늘과 다음 회에서는 음악적인 면에서 찬송가(Hymn)와 복음가(Gospel Song)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찬송의 노랫말은 하나님께 드려지기에 가장 아름다운 말, 곧 시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멜로디와 화성, 곧 음악도 역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어야 하기에 순음악(純音樂, 혹은 고전음악, Classic Music)이어야 한다는 것이 전통적인 찬송의 개념입니다. 학교 음악 시간에 배웠듯이 음악을 크게 순음악과 경음악(Light Music)으로 분류하곤 하는데, 이 때 순음악, 즉 클래식은 ‘예술적 가치가 높은 음악’이라고 정의하거든요. 예술적으로 수준 높은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 찬송을 한번 보십시오. 베이스 파트를 예로 들자면 ‘도도도라라파, 파미파레도솔, 솔도시라도레도시...’ 잘 훈련 받지 않은 성가대원으로선 노래하기 어려운 음정입니다.
죄송스런 말입니다만, 보통 베이스파트는 노래에 자신이 없는 분들이 하지 않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악보에 조금 4미리 정도 떨어져 있으면 ‘파’, 3미리 정도 아래면 ‘솔’, 음표가 위에 달렸으면 눈썹만 조금 올려 소리 내면 되니까요. 보통 웬만한 찬송가의 음정은 기본음인 ‘도파솔’이면 다 해결됩니다. 이 찬송도 그렇게 기본위치의 음으로 편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쉬운 그 방법을 택하지 않고 이토록 어려운 진행으로 작곡했을까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기에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여 표현 한 것입니다. 성전의 모든 기물들이 아름답고 정교하게 조각해 놓은 것과도 같이 말입니다. 시편 96편에 그 성소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아름다운 곡조 DIADEMATA는 그리스어로 ‘면류관들’이란 뜻인데요, 영국 캔터베리(Canterbury)태생의 엘비(George Job Elvey, 1816-1893)경이 작곡하여 1868년 ‘고금찬송가’(Hymn Ancient and Modern)에 발표한 곡입니다.
엘비는 어려서부터 교회 성가대원으로서 교회음악의 정통교육을 받아 뛰어난 오르가니스트가 되었고, 19세때 이미 영국황실의 성죠지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겸 지휘자가 되어 47년간이나 봉사하였습니다. 엘비 경은 “장엄하고, 감정을 드높일 수 있고, 교회의 아름다운 스테인드그래스나 높이 솟은 아취 같이 고무적이며 영감을 지녀야한다”는 교회음악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이 찬송을 부르면 그와 같은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엘비 경이 작곡한 오라토리오나 예배용 합창곡과 독창곡 등 많은 작품이 있지만 찬송가는 많지 않고, 우리찬송가에는 이 곡과 ‘감사하는 성도여’(306장) 두 곡이 실려 있습니다.
이 찬송을 부를 때에 둘째마디에서 ‘면류관 가지고’의 높이 솟은 ‘고’음은 원래 영어찬송가에서 ‘crowns’ “love” “peace”로 되어있고, 또 “내 혼아 깨어서”의 두 마디는 2도씩 상승모방으로 “주 찬송 하여라” “온 백성 죄를 속하신”으로 발전하여 주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가는 듯한 움직임을 주어 더욱 실감이 납니다.
2006. 03. 24
208장,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주님의 위로를 받으면...
제가 어렸을 적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이 찬송은 우리 국악인 줄 알았습니다. 노인들이 좋아하는 찬송이고, 매우 느리고 치렁치렁하게 부르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던 중 우연히 라디오에서 미국의 어느 남성사중창단이 매우 빠르고 경쾌하게 부르는 이 찬송을 듣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정교한 앙상블과 하모니가 흥겨웠고 재미있었습니다. 그 당시 재즈가 유행했던 때인데, 이 노래가 재즈 스타일인데 신기해했고, 경건하게 불러야만 되는 줄 알았던 찬송을 재즈로 부르는 데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이 찬송은 셋째마디의 ‘변하여 새사람’을 시작으로 후렴의 ‘예수 내 맘에’등 ♪♩ ♪ 리듬인 당김 음(syncopation)이 주를 이루는 일종의 재즈(jazz)라 할 수 있습니다. 재즈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미국의 남부, 뉴올리언스 변두리의 흑인 및 크리오울(흑인과 프랑스인과의 혼혈)들 사이에서 연주되어 형성된 춤이나 퍼레이드를 위한 음악 등에 1914년경에 누군가가 jass 또는 jas, jaz 등의 명칭을 붙인 것이 그 시초입니다.
재즈는 곡의 형식이나 곡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연주 스타일, 연주 그 자체에 대한 호칭이란 점에 재즈의 본질이 있습니다. 부르는 사람이 재즈의 감각과 표현력이 없으면 재즈와는 거리가 먼 것이죠. 즉흥성이라고 말 할 수 있는데요, 바로 이 점이 재즈의 매력입니다.
바로 이 재즈리듬을 사용해서 가브리엘(Charles Hutchison Gabriel, 1856-1932)이 이 찬송을 1914년에 작곡을 했습니다. 이 찬송을 음악적으로 경쾌하게 부르기 위해서는 당김음 처리에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찬송을 부를 때 “변하여 새사람 되고”에서 ‘변’자와 ‘새’자, 그리고 “주 예수 내 맘에 오심”에서 ‘주’자와 ‘내’자에 악센트를 주어 전혀 다른 노래가 되곤 하는데, 그러면 재즈의 맛이 뚝 떨어집니다. 리듬을 잘 타기 위해선 몸을 가벼이 흔들며, ‘변’자와 ‘새’자, ‘주’가 없는 듯이 약하게 살짝 하고, ‘하여’와 ‘사람’ 그리고 ‘예수’에 악센트를 주어야겠지요.
이 찬송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 노래의 첫 모티브와 마지막 단 “물밀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에서 ‘미파솔라시도레미파솔’ 하며 한 옥타브 반이나 순차진행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용솟아 쳐 올라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후렴 처음에 “주 예수”의 ‘주’자도 이 노래에서 가장 높은 음으로 되어 있어 높으신 주님을 나타내기도 하고요.
우리는 몇 주 전 18회부터 성 어거스틴이 정의한 ‘찬송의 3요소’(‘찬미’, ‘노래’, ‘하나님께 드려짐’)에 대하여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은 복음가(Gospel Song)의 음악적인 면을 조명해서 살펴보도록 하죠. 무엇보다 복음가는 이 찬송에서 보는바와 같이 세속음악 스타일인 경음악(Light Music)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순음악을 ‘예술적 가치가 높은 음악’으로 정의하는데 반해, 경음악은 ‘오락적 가치가 높은 음악’으로 정의하거든요. 복음은 어느 누구에게나 전파되어야 하기에 대중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실 복음가가 처음 나올 때에 미국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포스터(Stephen Collins Foster, 1826-1864)의 가곡이 애창되고 있던 때입니다. 포스터는 순수한 미국적 성격을 지닌 가곡을 최초로 작곡한 가곡작가인데, ‘오, 수잔나’ ‘스와니 강’ ‘금발의 제니’ 같은 아름다운 멜로디의 가곡이 참으로 많아 미국 사람들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애창되고 있지 않습니까? 평이한 그의 멜로디는 아름다운 정서와 따뜻한 정감을 부어 넣은 것이 많은데, 유럽의 민요 영향도 있긴 하지만, 미국 남부 흑인의 민속음악인 흑인영가나 그들의 생활에서 취재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복음가 작곡가들이 바로 이 포스터의 가곡과 같은 분위기의 노래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기에 포스터는 단 한 편의 찬송을 짓지 않았지만 찬송가에 끼친 영향은 실로 큰 셈이지요.
미국 오하이오 주의 브라운(Brown County)태생인 그리스도교회 교단의 맥다니엘(Rufus Henry McDaniel, 1850-1940)목사가 지은 찬송은 약 100편쯤 되는데 우리 찬송가에는 이 찬송만 실려 있습니다. 특히 이 찬송은 그의 아들을 잃은 후 뼈아픈 시련의 나날을 보내다 주님의 위로를 받고 그 이듬해인 1914년에 지은 것입니다.
아들의 자리에 주님이 대신 들어와 더 크나큰 기쁨과 평안 얻어 이 같은 간증을 하게 된 것이죠. 이 찬송의 영어 원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What a wonderful change in my life has been wrought Since Jesus came into my heart"
우리도 잠시, 예수께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신 이래 우리의 삶이 얼마나 놀랍게 바뀌어졌는지 생각해 보실까요?
2006. 04. 05
20장, 다 감사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
어느 날 저는 여행 중에 지방에서 주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매 주일 일찍부터 성가연습 하랴 여러 가지 봉사 하랴 분주하던 마음이 그 날은 풀어져 편안하게 호텔에서 기독교 TV를 통해 서너 분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은혜가 충만한 아침이었습니다. 어느덧 예배 시간이 되어 인근 교회에 가려고 주섬주섬 옷을 입고 있는데, 식구들이 아까 예배를 다 드렸는데 교회에 가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아무리 신령한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 해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서둘러 예배당에 갈 준비를 했습니다.
우리는 몇 주 전 18회부터 성 어거스틴이 정의한 ‘찬송의 3요소’(‘찬미’, ‘노래’, ‘하나님께 드려짐’)에 대하여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은 세 번째 요소인 ‘하나님께 드려짐’, 즉 찬송의 대상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무리 좋은 가사, 아무리 훌륭한 멜로디라 하더라도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으면 찬송이 될 수 없습니다. 예배학자들은 예배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 정의 합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만남’이요,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대화’(對話)인 것입니다.
대화를 영어로 ‘다이아로그’(dialogue)라 합니다. 다이아로그의 반대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모노로그’(monologue), 독백(獨白), 독화(獨話)이지요. 하나님 없는 교회, 하나님 없는 예배, 하나님 없는 찬송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예배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받는 부분’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순서로서의 찬양은 마땅히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분,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것입니다. 굳이 화살표로 표기한다면, 하나님을 향하여야 하겠지요(Godward).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 노래는 찬송(Hymn)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 찬송은 “온 맘을 주께 바쳐”하며 주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루터파와 가톨릭과의 30년 종교전쟁(1618-1648)이 끝나고 평화를 맞이하면서 싸움에서 승리한 독일 삭소니(Saxony)의 선거후는 역대 상 29장 13절을 교회에 주며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명하였는데, 이 때 링카르트(Martin Rinkart, 1586-1649)목사가 “자,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자”(Nun danket alle Gott)는 이 감격적인 찬송을 짓게 되었습니다.
링카르트 목사는 독일 삭소니의 아이렌부르그(Eirenburg) 태생으로 라이프지히 대학교수를 하며 합창단 지휘도 하는 음악에 소양이 깊은 분인데요, 나중에 목사가 되어 고향인 아이렌부르그에서 부감독까지 지냈습니다. 전쟁과 빈곤, 질병으로 인해 수천 명이 죽고 아내까지 잃는 비통한 상황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일하면서 여러 편의 찬송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찬송의 1,2절은 외경의 집회서 50장 22-24절을 기초로 하여 지은 시인데, 본문은 이렇습니다. “자, 이제 만물의 하나님을 찬미하여라. 그 분은 어디에서나 큰일을 하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나날을 높여 주셨고, 우리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 주님! 우리 마음에 기쁨을 주시고 우리 시대에 평화를 주시며 이스라엘에 영원한 평화를 주소서. 우리에게 항상 자비를 베푸시고, 이 시대에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리고 3절은 찬송 시의 전통에 따라 ‘영광송’(Gloria Patri)으로 마무리합니다.
곡명 NUN DANKET을 작곡한 크뤼거(Johann Cruger, 1598-1662)는 저 유명한 코랄 ‘주는 귀한 보배’(Jesu, Meine Freude, 452장)의 작곡가이기도 한데요, 우리 찬송가에 이 두 편이 실려 있습니다. 그는 독일 올뮛츠(Olmutz)의 예수회 대학과 레겐스부르그(Regensburg)의 시 예술학교를 거쳐 비텐부르그(Wittenburg)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요, 베를린의 성 니콜라스 교회의 칸토르로 있으면서 성가대 봉사와 작곡을 했습니다. 코랄을 비롯하여 모테트, 성가 합창, 협주곡 등 여러 작품을 1647년에 작품집 ‘Praxis Pietatis Melica’에 수록했습니다. 독일의 회중찬송을 코랄(Chorale)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 코랄은 원래 6성부인데, 멘델스죤이 그의 작품 ‘찬양 송가’(Lobgesang, op.52, 1840)에서 4성부인 지금의 형태로 편곡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J.S.바하는 이 코랄을 주제로 한 칸타타 ‘다 감사드리세’(Nun danket alle Gott, BWV.192, 1730)를 미완성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이 찬송은 ‘대감사가’인 ‘테 데움’(Te Deum)으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J.S.바하의 종교개혁주일을 위한 칸타타 ‘주 하나님은 태양이시며, 방패이시라’(Gott der Herr ist Sonn'' und Schild, BWV.79)에서는 두개의 호른 중주가 어울려 이 코랄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코랄이야말로 찬송 시로 보나, 멜로디를 보나 경건한 찬송의 모범입니다. 오른 쪽 하단에 ‘찬양과 경배’로 분류 되어 있듯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주일예배 첫 찬송으로 적합한 찬송이며, 특히 감사주일이나 종교개혁주일 첫 찬송으로 선곡함이 좋을 듯 합니다.
2006. 04. 13
154장, 예수 부활 했으니
“Christ the Lord is risen today!”
봄날 이른 아침마다 느끼는 감정인데요, 언제나 상큼한 공기를 마시며 매번 부활절 새벽 같은 느낌이 드는 데 주일 새벽이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엔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러 남산공원에 따라가곤 했는데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하긴 매주일이 부활주일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안식일인 토요일은 주님께서 무덤에 계셨던 죽음의 기념일이고, 안식 후 첫 날인 일요일은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을 박차고 일어나신 ‘주님의 날’, 곧 주일(主日)인 것이죠. 그래서 매 주일이 부활주일인 셈입니다.
부활절 찬송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단연 “할렐루야”입니다.
가톨릭이나 루터교 등 의식을 중시하는 교회의 관습으로는 수난절 전 3주일 반 동안을 전사순절 절기로 지킵니다. 부활주일로부터 50일이 되는 주일을 킹카게시마(Quinquagesima), 60일 전 주일을 섹사게시마(Sexagesima, 실제로는 64일), 70일 전 주일을 셉투아게시마(Septuagesima, 실제로는 74일)라는 주일 이름을 가지고 있지요. 이 때에도 사순절과 마찬가지로 예복이나 강대보의 색깔이 참회와 성찰의 뜻을 지닌 보라색인데요, 예배의식에서 할렐루야와 영광의 송가를 생략했다고 합니다. 특히 사순절이 시작되기 바로 전 주일에는 ‘할렐루야 고별’(farewell to Alleluia)예배로서 할렐루야를 마지막으로 부르고, 할렐루야를 부르는 동안 할렐루야 초상을 예식적으로 강단에 매장하였다가 부활절 첫 예배에서 관을 열고 할렐루야를 부르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토록 40일 동안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위해 금욕하며 참회하고, 명상하며 성찰하면서 기쁨의 노래인 ‘할렐루야’까지 억제하다가 부활주일 새벽에 이르러 ‘할렐루야’를 힘껏 외치며 부르니 얼마나 가슴이 벅찼겠습니까? 마치 일제 강점 하에 있다가 해방을 맞아 “대한독립 만세” 외치던 우리 선조들처럼 말입니다.
이 찬송에서 “예수부활”하는 첫 대목도 예수님께서 수의를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듯이 ‘도미솔’하며 일어나는 음화(音畵)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민찬송”, “천사들이” 등 모든 첫 대목이 상행(上行)하며 솟고 있지요? 특히 “사망권세 이기고”에선 가장 높은 음을 사용함으로서 기쁨 벅찬 승리의 감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찬송은 가사와 노래의 구조로 볼 때 히브리 시를 읊는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보는데요, 우리 노래 ‘쾌지나칭칭나네’처럼 ‘메기고 받는’ 응창(應唱, responsorium)형식으로 되어 있지요. 먼저 선창자(先唱者)가 “예수 부활 했으니” 하고 메기면, 모든 이들이 “할렐루야”하고 받고, “만민 찬송 하여라”하고 메기면 “할렐루야”로 받아 응창합니다.
“할렐루야”로 받는 부분도 참 재미있지요. ‘할’에서 ‘아’모음을 길게 늘어뜨린 멜리스마(melisma)가 매우 즐겁습니다. 멜리스마란 모음(母音) 한 음절에 많은 음표가 붙어있는 것을 뜻하는데요, 많은 작곡가들은 ‘기쁨 동기’(joy motif)라고 해서 가사 중 뜻 깊은 단어에 사용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헨델의 메시야 중 ‘우리를 위해 아기 나셨다’를 보면 ‘born’이란 단어를 길게 늘어뜨린 멜리스마가 있지 않습니까? 가사 가운데서도 유독 할렐루야에 붙여진 멜리스마는 ‘유빌루스’(jubilus)라고 해서 신앙심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쓰곤 했습니다.
유빌루스는 환희라는 뜻인데, ‘아’(a)모음을 계속 부르다 보면 웃음소리 같이 들리지요? “하하하하할렐루야!”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통곡이 변하여 웃음이 넘치는 천국잔치의 웃음소리 같지 않습니까?
이 찬송의 3절까지는 14C경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 근방에서 불려지던 11절까지의 긴 라틴 찬송이었는데, 원래 ‘할렐루야’라는 후렴구는 없었습니다. 이 찬송을 챨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1788)가 3절로 추리고, 마지막 절을 지어 붙여 1740년 ‘찬송가와 성시’(Hymns & Sacred Poems)에 발표했습니다. 이 후 ‘성가작가선’(Complete Psalmodist)에 편집인인 아놀드(Anold)가 ‘다윗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편곡해서 실을 때 “할렐루야” 후렴구를 첨가하여 지금의 응창식의 부활찬송이 되었습니다.
웨슬리가 편집하기 이전에는 이 찬송을 헨델이 작곡한 오라토리오 ‘유다스 마카배우스’(Judas Macabaeus)에 나오는 개선행진곡 ‘보아라 용사’(155장, ‘주님께 영광’) 곡조에 맞춰 불렀는데 물론 ‘할렐루야’ 후렴구는 없었겠지요. 지금의 멜로디는 1708년 편찬된 ‘리라 다비디카’(Lyra Davidica)에 작자미상으로 실렸던 ALLELUIAS라는 곡에 붙여 애창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부활절 아침에 만나는 사람마다 첫 인사말로 “주 그리스도께서 오늘 살아나셨습니다.”라고 했다고 하는데, 웨슬리는 이 인사말을 노래 첫 대목에 넣었습니다.
“Christ the Lord is risen today!”
2006. 04. 19
135장, 갈보리산 위에
험한 십자가(the old rugged cross)
가톨릭 성당에 들어가면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는 여러 모습들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새겨 걸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십자가의 길’이라고 합니다. 라틴어로 슬픔의 길, 고난의 길이란 뜻인데 십자가 정거장(Station of the Cross)이라고도 하지요. 성지순례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오르던 그 처소 마다 머무르면서 기도를 올리는 곳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은 빌라도의 집에서 출발하여 십자가를 지신 곳,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다 넘어지신 곳, 어머니 마리아와 만나신 곳,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진 곳, 베로니카(Veronica)라는 여인이 손수건을 주어 땀을 씻은 곳, 쓰러지신 세 곳(두 번째는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 예루살렘 여인들과 만나 위로하신 곳, 로마 병사로부터 옷을 벗기고 찢어 나누던 곳, 땅바닥에 놓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예수님을 매단 십자가가 있던 곳, 시신을 내려놓은 곳, 예수님을 안장한 무덤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열네 처소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찬송은 우리들로 하여금 찬송을 부르며 ‘십자가의 길’을 순례하게 합니다. 처음의 “갈보리 산 위에”의 ‘미파솔파라솔’은 “십자가 섰으니”에서 2도 상승한 모방으로 ‘솔솔라솔시라’로, 그리고 “주가 고난을”에서 ‘라라시라솔’로 2도씩 상승하여 계속 올라가고 있습니다. 악보의 오르고 내리는 경치를 보면 마치 갈보리 산으로 오르는 비아 돌로로사 같습니다. 갈보리(Calvary)는 성경에 골고다(Golgotha)로 표현된 라틴어 명칭입니다. “주가 보혈을 흘림일세”의 ‘흘림일세’(3절의 ‘보혈일세’)도 피를 흘리듯이 ‘파미레도’하며 하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례의 길은 계속됩니다. 후렴에서 “최후승리를 얻기까지”는 마치 십자가 위로 따라 올라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드디어 “빛난 면류관 받기 까지”와 “험한 십자가”에 이르러선 마치 주님과 함께 시상대에 오른 듯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이 아름다운 찬송의 작사 작곡자는 미국 오하이오주 영스타운(Youngstown) 태생의 베나드(George Bennard, 1873-1958) 목사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목회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가난한 환경으로 이루지 못하다가 독학으로 준비하여 부인과 함께 어렵게 구세군사관교육을 받은 후 구세군의 한 군단 책임자로 봉사하였습니다. 감리교 감독교회로 교단을 바꾼 후부터 부흥사로 사역하면서 영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활약하였습니다.
베나드 목사는 평생 300곡이 넘는 찬송가를 작사 작곡하였는데, 오직 이 찬송가 한 편만이 즐겨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대한 신학적인 바른 이해를 위하여 연구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던 중에 이 찬송의 제목인 ‘험한 십자가’(the old rugged cross)란 어휘가 떠올랐고, 이 제목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면서 작시하기까지 수개월동안 고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1913년 어느 날, 미시간에서 부흥집회를 하던 중에 시상이 떠올라 갑자기 이 시를 막 읊어대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마침 옆에 있던 동역자가 듣고 즉시 옮겨 적어 완성되었습니다.
OLD RUGGED CROSS 제목의 이 멜로디도 그 해 미시간 주 포케이건(Pokagon) 감리교회에서 부흥집회를 하는 도중에 완성했습니다. 베나드 목사가 손수 기타반주로 그 교회담임목사인 보스윅 목사에게 들려주었더니 감동을 받아 그 즉시 악보를 프린트해서 밤 집회 때에 이 찬송을 사중창으로 불렀습니다. 1913년 6월 7일, 이 날이 이 찬송가의 초연일입니다. 이 후 이 교회는 이 날을 ‘험한 십자가의 날’ (The old rugged cross day)로 제정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가질 뿐만 아니라, 작곡자인 베나드와 초연 때의 연주자이름도 새긴 기념비도 세워서 이를 지금까지 기념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시간 주의 리드(Reed city)에 가면 우리나라의 장승처럼 도로변에 “험한 십자가”란 글자를 새긴 거대한 통나무 십자가가 있는데, 오가는 이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주 예수님을 언제나 생각하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멋있고 예쁘게 생긴 십자가를 목이나 귀에 걸고 다니기도 하고, 집에 장식하기도 합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과연 그렇게 매끈하고 멋있었을까요? ‘험한 십자가’인 영어 원문 ‘the old rugged cross’는 울퉁붙퉁하고 거칠고 보기 흉한 못생긴 십자가였겠지요. 우리는 그 십자가를 지고 함께 갈보리 산으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그 옛날 구레네 시몬처럼...
2006. 04. 26
233장,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
작년 해안을 휩쓴 화마(火魔)로 인해 그토록 경관이 아름답고, 죽죽 뻗은 해송(海松)으로 유명한 낙산사와 그 주변 숲이 새카맣게 타버려 얼마나 안타까워했던지요. 그런데요, 그 때에는 영원히 다시 살아날 것 같지 않았던 그 죽음의 동산이 다시금 새 생명을 받아 파릇파릇 새싹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면서, 이 봄에 부활 신앙을 다시금 느껴봅니다. 신문에도 사진 두개가 나란히 실렸더군요. 새카맣게 타버린 민둥산과 물가에 번져 오르는 푸르른 수풀. 너무도 대조적이지 않아요?
이사야서 35장을 보면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르며, 메마른 땅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샘이 되어 꽃이 무성하게 필 것이라 예언했는데요, 작사자가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찬송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돌아오듯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의 포로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영광스런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곡은 해리스(Magaret J. Harris)가 1906년에 지은 찬송입니다.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178장), ‘정결하게 하는 샘이’(198장)와 함께 우리찬송가에 세 곡이 실려 있는데, 작곡자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일본 선교사인 미국감리교 해리스 목사(Meriam Colbert Harris, 1846-1921)의 세 딸 중 한 분일 것이라는 것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해리스 목사는 내촌감삼(內村鑑三)을 비롯한 일본의 사상적, 정신적 위인들을 길러낸 인물입니다. 그는 삿포로에 농업학교를 세우고 청년들에게 땅을 사랑하는 마음을 고취시킨 분인데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많은 찬송을 지어 부르곤 했다고 하니 이 찬송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찬송을 부를 적마다 이사야서의 말씀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황무지가 장미꽃같이”는 이사야서 35장 1절과 2절 상반 절을 노래한 것이며, 진리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된 자를 나타낸 “구속함을 노래 부르며”는 9절 “오직 구원 받은 사람만이 그 길을 따라 고향으로 갈 것이다”를 노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처음 시작부분에 ‘솔솔도도도시도레미’에서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작은 음표로 표시된 반주의 ‘솔도미’는 꽃잎이 봉우리를 벌려 활짝 열리는 것 같지요? 그 아랫단의 작은 음표는 “랄랄라” 노랫소리 같기도 하고요. “샘물 터지고”에선 “퐁퐁퐁”을, 마지막 절 “면류관 쓰고”에선 껑충껑충 상을 받으러 시상대에 오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역사적 구원과 영적 구원의 감사노래인 “하나님의 아름다움과”에서는 35장 2절 하반 절을, “모든 괴롬 잊어버리고”에선 2절 상반 절과 10절 하반 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다”를 시로 나타낸 것입니다.
“마른 땅에 샘물 터지고”의 3절은 6절과 7절을 노래한 것이고, “거기 악한 짐승 없으니”는 9절 상반 절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도 그리로 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 길에는 그런 짐승들은 없을 것이다”를 노래한 것입니다. ‘샘물’이나 ‘물’이란 단어가 반복 되는데, 같거나 비슷한 어구를 겹쳐서 쓰고 있는데, 점층법(漸層法)이라고 하지요? 우리 찬송가사에는 빠져 있지만 “그 때에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저는 자가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사 35;6)라는 말씀도 함께 생각하며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은 진리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된 자만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 생명의 길에 들어설 것을 말하는 8절 말씀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찬송에는 “거룩한 길”이란 말이 열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데요, 원 영어 찬송에는 ‘메기고 받는’ 응창(應唱, responsorium)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선창자(先唱者)가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하고 메기면, 모든 이들이 “거룩한 길 다니리”로 받아 응창합니다. “거기 대로(大路)가 있어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란 8절 말씀으로 원 작사자는 ‘왕의 대로’라고 표현 했습니다. 이 시의 제목이 원래 ‘왕의 대로를 걸으며’(Walking in the King''''s Highway)이거든요. ‘왕의 대로’란 다메섹에서 지중해의 아카바 만까지 남북으로 뚫린 중요한 고대의 통상로입니다. 작사자는 고대로부터 남북을 가로지르는 이 대로를 하늘나라로 이르는 당당한 길로 비유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찬송에서 셋째마디의 “피는 것을 볼 때에”와 일곱째 마디, 마지막의 “거룩한 길 다니리”에서 한 박자 미리 나와 틀리게 부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장미 꽃 같이”, “노래 부르리”, “맑고 밝은”의 끝 음인 ‘이’, ‘리’, ‘은’의 음의 길이를 충분히 길게 하면서 여유 있게 불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후렴에서 “검은 구름”에서도 대부분의 회중들이 ‘검’을 한 박자 반으로 틀리게 부르고 있는데, 약박자인 ‘검’은 짧고 약하게 ‘거’라고 발음하고, ‘은’은 악센트를 넣어 리듬감 있게 ‘믄구름’이라 붙여 부르면 경쾌한 맛이 살아나게 되지요.
2006. 05. 04
299장, 예수께서 오실 때에
주께서 만드신 보석
화창한 봄날입니다. 빨간 꽃 노랑꽃 파랑 꽃 가지각색 꽃들이 만발한 봄 동산에 병아리 같이 노란 옷을 입은 어린이들이 소풍을 와서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야, 이런 곳이 천국 이겠구나”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5월 5일 어린이 날 마다 “오늘은 어린이 날 우리들 세상” 하고 노래하고 있는데요, 우리는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 선생님이 주도했던 색동회의 소년운동을 기억합니다. 그로 인해 우리나라에선 1920년에 처음 어린이날이 제정 되었지요. 그로 인해 교회에서도 5월 첫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키고요. “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돌이켜 보면 이 찬송은 바로 천국인(天國人)들의 노래가 아니겠습니까?
커싱(William Orcutt Cushing, 1823-1902)목사님이 지은 이 찬송은 기독교 문학사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어린이 찬송 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커싱은 미국 마사츄세츠 주 힝햄(Hingham) 태생으로 씨얼스벅, 오우번, 브룩클레이, 버팔로우, 스파르타, 뉴욕 등지에서 20여 년간 목회활동을 하였는데, 그의 나이 53세 때 아내와 사별한 이 후 절망과 고독 가운데 건강을 해쳐 종내 반신불수가 되어 시무하던 교회마저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불구의 몸으로도 사역할 일이 없을까 기도 중에 찬송시를 짓기 시작하여 그의 여생 동안 3백여 편의 찬송시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 찬송은 33살 때인 1856년에 말라기 3장 17절 말씀을 읽다가 영감을 얻어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위해 지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in the day when I make up my treasured possession)라고 되어있는데요, 이 분이 영감을 얻은 번역은 흠정역(欽定譯, Kihg James Version) 판으로 “나의 보석을 만들 때”(in that day when I make up my jewels)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 영어 찬송 시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주께서 만드신 보석, 그 아름다운 보석들은 빛나는 면류관에 달아 새벽 별같이 밝고 아름답게 빛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말라기 17절 하반절과 18절에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없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했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우리 찬송 가사의 ‘보배’로 번역된 반짝반짝 빛나게 될 보석(jewel)들인 것이죠. 그래서 원래의 제목이 JEWELS아닙니까?
커싱 목사님이 작사한 찬송은 우리 찬송가에 이 찬송 외에 ‘기쁜 일이 있어 천국 종 치네’(314장)과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344장)과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478장) 등 네 장이 실려 있습니다.
JEWELS의 제목을 가진 이 멜로디는 19C 뛰어난 미국의 음악가이며 위대한 찬송 작가인 루트(George Fredrick Root, 1820-1895)가 작곡했습니다. 루트는 미국 마세츄세츠 태생인데요, 어려서부터 여러 악기를 잘 다루는 등 음악에 있어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다고 하는데요, 보스톤으로 이주한 이 후에는 ‘내 주를 가까이’를 작곡한 메이슨 박사에게 배우기도 하고, 프랑스 파리음악원에서도 수학하기도 했습니다. 뉴욕으로 옮긴 그의 말년에는 뉴욕음악학교(New York Music Institute)를 설립하고 메이슨과 헤스팅스, 브래드버리 등 과 함께 이 학교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맹인음악학교에서 크로스비(Fanny Crosby)를 만나 함께 활동도 했습니다. 그는 시카고 대학에서 음악박사 학위도 받았다고 하는데요, 그는 출판사도 차려 저술활동도 하고 찬송가도 발간했는데 무려 75권이나 됩니다. 이러한 책들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좋은 찬송가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루트의 찬송은 이 찬송 외에 그가 직접 작사 작곡한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313장), ‘형제여 지체 말라’(329장), ‘큰 무리 주를 에워 싼 중에’(529장)와 멜로디만 작곡한 ‘사망을 이긴 주’(152장), ‘기쁜 일이 있어 천국 종 치네’(314장), ‘세월이 흘러가는데’(534장) 등 일곱 편이 실려 있습니다. 그 중 이 찬송과 ‘기쁜 일이 있어 천국 종 치네’(314장)는 커싱의 작사와 루트의 작곡이 콤비가 잘 맞아 탄생한 찬송입니다.
참고로 이 찬송은 로우리와 생키의 곡도 있는데, 이 루트의 곡이 제일 아름답습니다. 특히 후렴 첫 부분 “샛별 같은”(Like the stars)과 마지막 단 처음의 “반짝 반짝”(They shall shine)을 노래할 때면 가사와 같이 음도 가장 높기 때문에 그야말로 찬란히 빛나는 별을 보는 듯 하지요.
2006. 05. 08
304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
내가 어렸을 적에도 어머니주일이 되면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예배당에 가곤 했습니다. 어머님이 계신 분은 빨간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있다가 어머님 가슴에 달아드리고, 어머님이 먼저 가시고 안 계신 분은 하양 카네이션을 그냥 가슴에 달고 다니곤 했지요.
하얗게 차려입은 아래 위 한복에 빨강 꽃은 화사한 봄날과 함께 너무나 따뜻해 보이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전쟁 통에 일찍 부모를 잃은 저로서는 빨강 카네이션을 달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어찌나 부러웠었는지요. 그래도 저는 어머니를 대신해 친어머니 못지않은 사랑을 퍼부으신 고모님이 있었기에 빨강 꽃은 가슴에 달순 없었어도 어머니의 크신 사랑만큼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이 찬송가는 저의 고모님을 노래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거든요. 저는 설거지를 하며 흥얼거리는 고모님의 찬송소리를 언제나 들으며 자랐고, 베개 맡에서 성경 이야기를 들으며 잠들었으며, 매일같이 곤히 자다 새벽녘 흐느끼는 기도소리에 잠을 깨곤 했었습니다.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지키게 된 것은 쟈비스(Anna M.Jarvis)여사로부터 시작되었는데요, 그녀는 어머니를 기억하고, 그 사랑에 감사함의 표시로 카네이션 한 송이를 가슴에 달아드리는 운동을 폈는데요, 온 세계에 확산되어 국제협회도 생겨나게 되고, 드디어 그 분은 ‘어머니날의 어머니’로 불리기까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린이날과 어머니날이 제정되면서 교회에서도 오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 주일로 지키게 된 것 아닙니까? 언젠가부터 부모님을 함께 기리는 ‘어버이 주일’로 되었지만요.
이 찬송의 시를 작시한 주요한(朱要翰, 1900-1979)은 평양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비범한 재질과 치밀한 관찰력으로 신동으로도 불렸는데요, 평양의 선교사인 마포삼열(Moffet) 목사의 비서 겸 조선어 교사로 채용되어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나와 목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주공삼(朱孔三)목사가 일본 동경 조선인교회 목사로 부임하면서 명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중학시절에 ‘창조’지에 작품을 싣기도 했는데요, 3.1 독립운동이후 중국 상해에 건너가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지의 편집도 하면서 독립운동의 비밀결사인 흥사단에 입단하여 독립운동을 하였고, 호강대학에서는 화학을 전공했습니다.
학창시절, 합창단, 축구부, 야구부 주장, 영어웅변부 주장, 교내잡지 영문 주필, 주일학교 위원장, 과학클럽회장 등을 하였고,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 논설위원을 역임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는 경제인으로 활동을 하여 한국무역협회와 대한상공회의소를 창설하였고, 국회위원을 거쳐 부흥부, 상공부 장관까지 역임하였습니다. 그는 ‘새벽’을 비롯한 시와, 시조, 수필, 평론 등 수많은 작품을 남기었으며, 찬송가는 이 찬송 한편을 남기고 있습니다.
찬송가의 윗부분 작사 작곡자 이름 옆의 작사 작곡 년도가 1967년으로 되어있지요? 한국찬송가위원회가 1967년에 ‘개편찬송가’를 편집하면서 위촉하여 태어난 찬송입니다. 작곡가 구두회(具斗會, 1921- )는 충남 공주 태생으로 평양요한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일본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에서 수학하였고, 미국 보스턴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평야의 의성학교, 대전사범학교, 배재고등학교에서 교사를 거쳐 귀국 후에는 숙명여대에서 작곡과 교수로 학장을 역임하였습니다. 교회음악협회 회장과 한국음악협회 회장도 역임하였으며 남산감리교회에서 성가대지휘와 장로로 평생을 봉사하였습니다.
저서로는 ‘찬송가 다루기와 그 강해’, ‘화성학 연구’, ‘대위법 연구’, 가곡집, 성가합창곡집 등이 있으며, 은퇴한 후에도 칸타타를 작곡하는 등 왕성한 작곡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대학 스승이 되시고, 몇 년 전에는 제가 이끌고 있는 교회음악아카데미에서 서울바하합창단과 함께 작곡발표회도 열어드린 바 있습니다.
교회에서 매년 한번씩은 이 찬송을 부르게 되지요? 그럴 때마다 우리는 빛바랜 어머니의 초상을 보는 듯합니다.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헌신적으로 사신 신앙의 어머니, 아들 앞에선 언제나 자상하시던 모범적인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들려옵니다. 그래서 이 찬송의 클라이맥스는 9째 마디 “내가 울 때 어머님은 주께 기도드리고”의 높은 선율입니다. “주께 기도드리고”의 ‘도도도시레도시’가 어머니의 울음 섞인 간절한 기도소리 같지 않습니까? 2절에선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읊으시는 말씀에 영생의 기쁨이 느껴지고, 3절에선 꽃이 만발한 천국이 보이며 용기가 솟아오릅니다. 4절에선 “온유하게 살아라. 올바르게 살아라. 굳세게 살아라.”가르치신 어머님의 교훈이 들려옵니다. 이제 아들은 어머니의 사랑에 힘입어 드디어 일어섭니다. “예, 어머니의 뜻 받들어 살겠습니다. 보람 있게 살겠습니다.” 머지않아 생명시내 흐르는 곳에서 자랑스럽게 만날 수 있겠지요. 그 때까지 지켜 봐 주십시오. 어머니! 어머니!
2006. 05. 15
303장, 가슴마다 파도 친다
저는 학교선생을 오래 했습니다. 고등학교 교사로 출발하여 34년을 줄곧 대학에서 교수를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는데요, 지금도 제 나이 또래 보다는 수십 년 아래의 청년들과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다보면 부러울 때가 참 많이 있어요. 하루 종일 지나다보면 저는 힘이 모자라 허덕이는데 젊은이들은 며칠 밤을 새도 힘이 남아돕니다. 때로는 지나치게 불필요하다싶은 힘도 많이 가지고 있어 그 힘을 주체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때도 있지요. 그러다 보니 어쩌다 실수도 하게 되고, 주위의 유혹에 호기심도 많아 자칫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되기도 합니다. 그토록 남아돌아가는 힘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전도서에선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 12;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찬송은 젊은이들의 파도같이 넘치는 기상, 화산같이 타오르는 힘, 폭포같이 줄기차게 뿜는 피를 어떻게 주체할까를 노래합니다.
이 찬송의 작사 작곡 년도가 같은 1967년이지요? 1967년 하면 ‘개편찬송가’가 나온 해이니까 이 찬송도 찬송가위원회의 위촉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찬송의 작사자 반병섭(潘秉燮, 1924- )목사님은 만주에서 8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뒤이어 13살 때 어머니마저 잃고 고아로 자랐는데요, 그런 가운데에서도 16살 때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이 후 주님의 가르침을 본받으며 늘 희망에 넘치는 삶을 살면서 건실하게 자랐습니다. 그는 해방 후 월남하여 한국신학대학과 일본 동지사대학 대학원, 미국 루터신학대학원을 거쳐 지금은 캐나다 토론토 한인연합교회에서 이민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 찬송에는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개편찬송가’ 편집을 위한 찬송가위원회에서는 청년을 위한 찬송이 필요하여 당시 시인이었던 반병섭 목사님께 작사를 부탁했는데요, 반 목사님은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무진 애를 쓰던 끝에 하나님께 매달렸다고 합니다. 그래도 즉시 응답을 받지 못하고 일본 동경 동지사 대학에 유학을 갔는데요, 어느 날 잠자리에서 환상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눈앞에 끝없는 넓은 망망대해가 펼쳐지고 엄청난 파도가 밀려오는 광경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너무나 벅찬 마음에 벌떡 일어나 그 즉시 펜을 들어 그가 본 환상을 종이에 적어내려 갔는데, 바로 그 시가 ‘하늘같이’, ‘화산같이’, ‘대지같이’, ‘넓고 깊자’, ‘줄기차자’, ‘우람차자’ 같은 단어였다고 합니다. 이는 또한 돌이켜보건대 그가 젊은 시절 만주 벌판에서 키워왔던 비전이고 주님께서 용기를 주셨던 말씀이었다고 하는군요. 그야말로 젊은이들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이 힘찬 표현들이 부르는 이들로 하여금 불끈불끈 사명이 일어나게 하고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의 피를 끓게 합니다. 이 땅위에 태어난 것이 하늘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당당한 외침이 전 4절을 주도하고 있는데요, 워렌(Rick Warren)목사님이 쓴 ‘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 Driven)의 주제가 같기도 합니다.
이 곡은 이동훈(李東勳, 1922-1974)선생님의 작곡인데요, 그는 섬세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음악가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이면서 합창지휘자인 그는 필그림 합창단을 창단하여 합창의 묘미를 자아낸 우리나라 교회음악운동의 선구자입니다. 만년에 찬송가를 비롯하여 성가합창곡을 많이 작곡했으며 숙명여대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그의 작품이 3편이 수록되어 있는데요, 이 찬송과 ‘어둔 밤 마음에 잠겨’(261장),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461장)가 그 것입니다. 박력이 넘치고, 행진곡풍인 힘찬 멜로디가 더욱 힘이 솟게 합니다. 프레이즈의 시작마다의 붓 점으로 출발하여 ‘우리들의 푸른 꿈’에서 반음계적으로 솟아오르는 진행도 몰려드는 파도 같고, 분출하는 화산 같습니다. 음역(音域)도 넓어 ‘도’에서 ‘파’까지 이르는데, ‘주 만 따라’, ‘주 뜻대로’, ‘충성되게’에서 젊은이의 약동을 마음껏 나타내고 있습니다. 회중들이 부르기에는 ‘다’(C)장조로는 다소 높기 때문에 내림 나(Bb)장조로 이조(移調)하여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2006. 05. 26
514장, 누가 주를 따라
하나님 먼저..
몇 해 전 기독교방송 FM에서 음악을 진행할 때입니다. 애써 준비한 것을 그냥 방송으로 날려 보내는 것이 아까워 방송용 테이프를 집에 가져와 따로 복사해 보관하곤 했습니다. 복사하는데도 실시간이 걸리니 녹음기에 음악을 걸어 놓고 다른 일을 하곤 했지요. 새벽기도를 하러 교회에 가면서 녹음기에 걸어놓았다가 돌아오면 녹음이 다 끝나곤 하니까 그 방법이 제일 좋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녹음 준비를 하는데요, 그날따라 기기가 말을 잘 안 듣는 거 얘요. 시간은 자꾸 가는데... 교회에 갈 시간은 빠듯하고...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고 불안해 졌습니다. 바로 그때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먼저! 먼저! 먼저!... 내가 너에게 이 녹음기만 못하냐?” 저는 놀라 즉시 손을 놓고 교회로 향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최고로 인정하면서도 그 분을 맨 나중 순서에 놓곤 합니다. 기도하다 말고 전화를 받기도 하고, 교회에 가야할 시간임에도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면 무시해 버리곤 하지요. 결국 하나님은 우리 생활에 있어서 더 중요(?)한 일로 인하여 언제나 꼴찌로 밀려나는 셈이죠. 이 후 저는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 먼저’라는 생각을 갖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찬송은 영국의 유명 찬송시인인 하버갈(Frances Ridley Havergal, 1836-1879)이 지었는데요, 그는 애스틀리(Astley)에서 하버갈(William Henry Havergal, 1793-1870)목사님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하버갈 여사는 어려서부터 시에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해 일곱 살 때부터 시를 썼다고 하는데, 병약해서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도,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같은 어학과 성경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열네 살 소녀 때 이미 영적인 체험을 하여 그의 영혼을 주님께 바쳐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 찬송은 그의 나이 41세 때인 1877년 가을, 역대상 12장 18절 “다윗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속하겠고, 이새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함께 하리니”라는 말씀에서 영감을 받아 시를 지어 ‘가정 선교’(Home Missions)란 제목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이 본문은 다윗과 사울의 싸움에서 베냐민과 갓 지파, 그리고 유다 자손 가운데서 다윗에게 돌아와 그를 따른 기록의 말씀인데요, 이 대목에서 하버갈은 우리의 대장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이란 절대적으로 그 분을 섬기는 것인데, 과연 그리스도의 편에 설 자가 누구인가를 거듭 물으며, 그 편에 서는 길만이 승리하는 길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버갈은 원래 5절 가사로 작사 작곡하여 이듬해인 1878년 ‘충성된 응답’(Loyal Responses)에 발표하였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원 가사에서 2,3절이 생략되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그가 작사한 찬송 ‘내 너를 위하여’(185장), ‘주 날 불러 이르소서’(267장), ‘나의 생명 드리니’(348장), ‘영광을 받으신 만유의 주여’(375장), ‘주 없이 살 수 없네’(415장), ‘영광스럽도다 참된 평화는’(472장), ‘예수 영광 버리사’(504장), ‘어두운 후에 빛이 오며’(535장) 등 아홉 장과 작곡한 찬송 ‘즐겁도다 이 날’(157장) 한 편 등 열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곡이름 ARMAGEDDON은 1853년 출판된 레이릿츠(Layriz)의 ‘독일 교회음악의 배움’(Kern des deutschen Kirchengesangs)에 실린 라이카르트(Luise Reichardt)의 멜로디인데요, 이 멜로디를 저명한 영국 교회음악작곡가 고스(John Goss,1800-1880)가 편곡하여 하버갈의 시에 붙여 1872년 ‘교회 시편가와 노래집’(The Church Psalter and Tune Book)에 실은 것입니다. 고스는 우리 찬송가에 ‘힘차게 일어나’(386장)을 작곡하고, 이 찬송과 함께 ‘내 영혼아 찬양하라’(19장)등을 편곡한 찬송이 있습니다.
아마겟돈이란 말은 요한계시록 16장 16절에 나오는 단어로 히브리어로 ‘므깃도의 산’라는 뜻인데, 므깃도는 고대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터 중 하나라고 하는군요.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나님과 사단의 세력 간에 일어날 종말론적인 최후 전쟁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멜로디는 한동안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389장)의 가사에 붙여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찬송은 두 군데만 빼고는 군가처럼 모두 4분 음표 중심으로 되어있습니다. 1절의 원래 영어 가사에선 여덟 번의 질문이 계속됩니다만, 우리 찬송가엔 네 차례의 질문으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에 17째 마디부터 우리의 힘찬 응답이 따르게 됩니다. “부르심을 받아”에선 ‘도솔미도’로 하행하여 주님의 부르심을 나타내고, 이에 “주의 은혜로”에선 ‘도레미파솔’로 순차 상행함으로 주님께 나아감을 뜻하여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주를 따라 가네”(We are on the Lord''s side)에 이르러선 높은 음으로 승리감에 넘치게 합니다. 원어에서 높은 음 ‘가네’의 ‘가’음이 ‘주님’(Lord)이거든요.
2006. 06. 05
82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주님을 생각하면...
언젠가 교계신문에 어느 목사님이 ‘개만도 못한 나’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신 적이 있는데, 제목이 흥미로워 읽어보았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께서 집회를 인도하느라 오랫동안 집을 떠났다가 돌아오면서 집 대문에 들어서는데, 기르는 개가 멀리서부터 주인을 알아보고 반갑다고 껑충껑충 뛰어 달려들며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겨우 뜯어 말리고선 방에 들어와 흙을 털고 옷을 벗으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아 저 개가 주인인 나를 이토록 반갑다고 좋아 날뛰는데, 나는 어떠한가? 명색이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라 하면서 저 개가 나를 좋아하는 만큼 내가 주님을 그토록 좋아하고 있나? 아! 나는 개만도 못하구나!”
이사야서 61장 10절 말씀은 공동번역이 마음에 듭니다. “야훼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나의 하나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라고요. 그래서 요리문답에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이지요. 이 찬송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대표적인 찬송입니다.
이 찬송의 작시자인 스웨인(Joseph Swain, 1761-1796)목사는 영국 버밍햄(Birmingham)태생으로 일찍 부모를 잃고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석조건물인 돌에 조각을 하는 석공예공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하나님을 만나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 이래 드디어는 구원의 기쁨을 찬송 시로 표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0세인 1791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35세의 짧은 나 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왈워드(Walworth)에 있는 침례교회에서 5년간의 목회를 하였는데요, 학력은 모자랐어도 성경을 기초로 한 그의 강해 설교는 매우 은혜로웠다고 합니다. 이 찬송의 작사년도가 1791년이니 목사가 된 바로 그 해이죠. 그의 찬송 시는 주로 ‘왈워드 찬송가’(Walworth Hymns)에 발표했는데요, 우리 찬송가에는 이 찬송 한 장만 수록되어 있습니다.
찬송 곡조 MEDITATION은 미국의 작곡가 루이스(Freeman Lewis, 1780-1859)의 작품인데요, 예이드(John Wyeth, 1770-1858)가 1813년 ‘성가의 보고’(寶庫, Repository of Sacred Music)에 발표하였고, 이 곡을 다시 메인(Hubert Platt Main, 1893-1925)이 편곡하였습니다. 메인은 음악학자이면서 출판인으로서 대중적인 복음성가를 천 여곡을 작곡하였고 많은 곡을 편곡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 ‘십자가를 내가 지고’(367장)도 원래 모차르트의 곡인데 그가 편곡한 것이죠.
구약성경 아가서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랑의 시이죠. 여기에 등장하는 남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여자는 바로 우리들이거나 교회를 비유하지요.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신 적 있지요? 다 잊으셨습니까? 어땠어요? 사랑하는 연인은 그 자체가 기쁨이기에 만나면 즐겁고, 헤어지면 아쉽고, 그립고, 생각나죠? 1절이 그러한 내용입니다. 우리의 연인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기쁨과 소망이요, 생명이기에 늘 찬송하며 만나도 아쉬움뿐이죠. 연인을 만난 기쁨과 새로운 세계의 환희를 노래합니다. “임은 나의 것, 나는 임의 것”(아6;3) 그래서 노래도 ‘도레미파솔’하며 상행 순차진행하며 나아갑니다. 그리고선 도약(跳躍)되는 ‘나의 생명’의 ‘솔도’에서 우뚝 서계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죠.
2절과 3절에선 보이지 않는 주님을 그리워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나에게 말하여 주세요. 임은 어디에서 양떼를 치고 있습니까? 대낮에는 어디에서 양떼를 쉬게 합니까?”(아1;7상) “양떼를 치는 임의 동무들을 따라다니며, 임이 있는 곳을 물으며 헤매란 말입니까?”(아2;7하)
4절에서 드디어 주님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납니다. “저 소리, 나의 사랑하는 이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아5;2)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토록 그리던 자비롭고, 화평한 모습,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문 앞에 나타납니다. “거친 들을 헤치며, 연기 치솟듯 올라오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몰약과 유향 냄새 풍기며, 장사꾼들이 가지고 있는 온갖 향수 냄새 풍기며 오는구나”(아3;6)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면 온 천지가 새롭고,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이니 어떻겠어요? 천사들이 반겨 노래하고, 이내 주님이 계신 곳은 꽃동산이 되고, 천국이 되는 것이죠.
5절에선 꿈에도 그리던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오 나의 사랑, 나를 기쁘게 하는 여인아, 그대는 어찌 그리도 아리땁고 고운가?”(아7;6) 우리 또한 사랑의 고백을 하게 되지요. “나는 임의 것, 임이 그리워하는 사람은 나, 임이여, 가요. 우리 함께 들로 나가요. 나무 숲 속에서 함께 밤을 보내요.”(아7;10-11)
그리고선 다시 되뇝니다. “나의 생명과 나의 참 소망은 오직 주 예수뿐일세”
2006. 06. 09
173장, 불길 같은 성신여
지난 월드컵을 회상하며
월드컵 한국의 경기가 있던 날, 저는 친구들과 함께 대형 TV화면이 있는 레스토랑에서 응원을 했습니다. 우리는 나이답지 않게 남들처럼 붉은 셔츠들을 입고, “대~한민국”을 외쳤습니다. 8강전인 세계적인 강호 대 스페인 전에서는 연장전도 끝나고, 피 말리는 승부차기에서 홍명보 선수가 통쾌한 슛으로 극적인 승리를 확정지었을 때, 우리 모두는 함성을 올리며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한 덩어리가 되어 미친 듯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시킨 음식들도 네 것 내 것 없이 어느새 모두의 것이 되어버렸고, 처음 보는 이들과도 승전의 이야기들로 막 떠들어댔습니다. 어느 새 온 거리는 뛰쳐나온 군중들로 축제의 거리가 되어버렸고, 차들은 경적을 울리고, 오가는 이들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하며 떠들 썩 했지요. 지금도 그 때의 감격이 되살아옵니다. 저는 집에 돌아오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붉은 색은 성령의 색깔인데, 이 나라가 이처럼 성령 충만한 나라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요. 그때, 성령 받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떠올랐습니다. 네 것 내 것 없이 물건을 통용하고,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았습니까?(행;44-47) 저는 마음속으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이 나라가 이처럼 성령의 불길로 가득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찬송의 작사자 프라이(Charles William Fry, 1837-1882)는 영국의 살리스버리(Salisbury) 태생인데요, 열일곱 살 때 구세군 부흥집회에서 예수를 영접했다고 합니다. 구세군하면 생각나는 것들이 있죠? 크리스마스 때 자선함과 브라스밴드... 바로 이 밴드의 효시인 분입니다. 원래 건축업에 종사하면서 취미로 트럼펫 일종인 코넷을 불었는데, 그의 가족들에게도 가르쳐서 가족 브라스밴드를 조직했습니다. 1878년, 구세군 창시자인 부스(Booth)목사가 이끄는 전도 집회에 가족악단이 특송을 하면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고, 이 후 구세군 전도 집회가 열릴 때마다 초청되어, 드디어는 1880년, 생업을 버리고 구세군 전도단 일원으로 평생을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구세군에선 관악 합주인 브라스밴드로 전도의 효과를 극대화시켰고, 이제는 구세군을 상징하는 없어선 안 될 귀중한 군악대가 되었습니다. 프라이의 찬송은 우리찬송가에 ‘내 진정 사모하는’(88장)과 이 찬송 등 두 편이 실려 있습니다.
WAITING FOR THE FIRE의 이 멜로디는 원래 영국 민요였던 것을 프라이가 자신의 가사를 붙여 사용한 것입니다. 구세군 군악대를 창설한 프라이의 구세군 찬송이기에 이 찬송을 관악합주 반주로 노래한다면 더욱 의미가 있겠죠?
이사야서 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예언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고, 주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는데, 천지가 요동하는 천사들의 찬양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때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나는 죽었구나, 입술이 더러운 사람인데” 하며 떨고 있을 때, 천사가 불타는 성전 숯을 부집게로 집어 그의 입술에 닿게 하여 죄를 사해 주시죠. 그 때 이사야는 “내가 누구를 보낼까?”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즉시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라고 나서죠. 바로 이 말씀에서의 성전 숯불이 이 찬송의 주제입니다.
“성신이여 임하사”의 후렴 가사는 9C의 마우루스(Mabanus Maurus, c.775-856)가 지은 ‘오소서 성령이여’(Veni Creator Spiritus)나 12C 부속가(Sequence)인 ‘오소서 성령이여’(Veni Sancte Spiritus)와 같이 전통 있는 오래된 찬송에서부터 쓰여 진 가사입니다. 거의 모든 성령에 관한 찬송이 이 기도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8마디 마지막 “영광 보여 주소서”의 경치를 보면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후렴은 불길이 솟아 오르내리고, “만족하게 하소서”에서 한 박 먼저 나오는 박은 마치 불붙은 장작이 툭탁거리며 튀는 것 같기도 하고, 주님이 주시는 만족은 그야말로 족한 은혜이기에 충만을 나타내는 듯하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기다리는 우리게”에서 ‘게’음을 2박으로 짧게 노래하여 틀리게 노래하는데, 주님의 응답을 간절히 오래토록 기다리는 마음으로 완전한 3박으로 길게 노래하십시오.
그리고 더욱 멋있는 부분은 “불로, 불로”이지요. 원어 찬송 가사 역시 “Fire, file”인데, 그야말로 하늘에서 뜨겁고도 강한 성령의 불 폭탄이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만족하게 하소서”도 하행 순차진행하고, 이 부분도 강조된 첫 박으로 하행 순차 진행함으로 성령의 불덩이가 쿠웅, 쿠웅 떨어져 마지막 “충만하게 합소서”의 ‘합’에 붙은 ?에서 충만함을 느끼게도 됩니다.
2006. 06. 12
188장, 만세반석 열리니
가장 좋은 찬송의 조건...
찬송가 중에서 가장 좋은 찬송(The Best Hymns)을 뽑는다면 어느 찬송이 일등을 할까요? 그리고 찬송을 편집할 때, 어떤 기준으로 선곡하면 좋을까요? 교인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노래라고 해서 과연 찬송가에 편집할 수 있을까요? 좋은 찬송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요, 찬송학자인 브리드(David R. Breed)박사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조건에는 맞아야한다고 했습니다. “첫째, 많은 단체들을 파악해야 한다. 둘째, 단체파악은 영구적이어야 한다. 셋째, 많은 성도들이 장엄하고도 일정한 예배에 사용되어야 한다. 넷째, 권위 있는 단체에서 구체화되어 승인된 기독교 기관에서 출판, 인정되어야한다.”고 했습니다. 즉 찬송은 젊은이나 어른들 할 것 없이 많은 단체들이 좋아해야 하는데, 그것은 한 때, 한 세대에 그칠 것이 아니라 꾸준히 애창되는 곡이라야 한다는 것이죠. 또 찬송이 주일학교나 부흥회 같은 어느 특정한 집회에서만 사용되어서도 안 되고, 혹 공인되지 않은 출판일 경우 여과 없이 불려져 이단에 빠질 위험도 생기게 되니까요.
꽤 오래 전입니다만, 영국교회에서 당시 2천여 편의 찬송을 검토하고 투표를 했습니다.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투표를 얻은 네 편의 찬송이 있었는데, 이 네 찬송을 ‘위대한 4찬송’(The Great Four)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 밤도 찬송 드리자’(개 50장), ‘천사 찬송하기를’(126장), ‘우리구주 오신다’(개 148장), 그리고 바로 이 찬송 ‘만세반석 열리니’입니다. 이 찬송은 영국 서레이(Surrey)의 판햄(Farnham) 태생인 토프레이디(Augustus Montague Toplady, 1740-1778)목사님이 지은 시인데요, 그는 웨스트민스터와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공부했고, 바로 이 트리니티 대학 시절 감리교 모리스(James Morris)목사가 인도하는 부흥집회에 참석했다가 구원의 확신을 얻고, 드디어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1762년 영국 국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고, 블래그던(Blagdon), 파르레이(Farleigh)에서 부목사, 1766년 브레드함버리(Breadhambury)의 교구목사를 했고요, 1775년에는 시스터필드(Leycester Field)의 칼빈교회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는 열렬한 칼빈주의자로서서 평생을 칼빈의 예정설을 부인하는 아르미니안(Arminian)과 신학적인 논쟁으로 투쟁하며 살았습니다.
토프레이디 목사님의 나이 36세 때인 1775년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는 소나기를 만나 큰 바위 밑으로 숨게 되었는데, 이 때에 영감을 받아 1절 찬송을 짓게 되엇지요. 그는 곧 ‘복음지’(The Gospel Magazine)에 ‘삶의 여정’(Life a Journey)란 제목으로 싣게 되었고, 후에 우리가 부르는 2,3,4절을 추가하여 발표했습니다. 38세의 짧은 생이지만 병약한 몸으로도 늘 기쁘게 살았다고 하는데요, 토프레이디 목사님의 찬송은 우리 찬송가에 이 찬송과 더불어 ‘고요한 바다’(503장) 등 두 편이 실려 있습니다.
작사자 토프레이디 목사님의 이름을 딴 TOPLADY곡조는 미국 코넥티커트 주 워싱톤(Washington) 태생인 헤스팅스(Thomas Hastings, 1784-1872)의 작품입니다. 그는 어려서 열두 살 때 부모를 따라 뉴욕으로 이사를 갔는데, 당시의 뉴욕은 미개척지여서 학교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 했습니다. 눈도 지독한 근시인데다가, 몸은 털과 피부가 하얗게 되는 변백종을 앓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거의 독학으로 18세 때 교회 성가대 지휘도 하고, 22세 때엔 음악교사를 하며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성음악’(Musica Sacra)라는 작품집도 발간하고, ''내 주를 가까이‘를 작곡한 유명한 메이슨(Lowell Mason)박사와 함께 활동하며 미국교회음악의 발전을 위해 힘쓴 분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찬송은 그의 나이 46세 때인 1830년 작곡하였고, 1832년 ‘공중예배용 성가집’에 발표하였습니다. 54년간 다른 곡조에 의해 여러 모양으로 불려지다가 이 때 비로소 헤스팅스의 곡을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지요. 그가 지은 찬송은 600편 이상 된다고 하는데, 우리 찬송가에는 이 찬송과 함께 ‘찬양 성부 성자 성령’(6장), ‘빛나고 높은 보좌와’(27장), ‘이 세상 풍파 심하고’(247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248장), ‘나그네와 같은 내가’(422장), ‘자비하신 예수여’(450장) 등 일곱 편이 실려 있습니다.
이 찬송은 흔히 장례식이나, 시신을 땅에 묻는 하관식 때에 많이 불리기도 합니다. ‘만세반석’(Rock of Ages)의 ‘만세’(萬世)는 영원한 세월, 만대(萬代)를 뜻합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반석을 쳤을 때 샘이 터졌듯이, 만세반석이 열릴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영생수가 터져 나와, 죄인인 우리를 살려내시는 보혈의 힘이 느껴지는 훌륭한 찬송입니다.
다윗이 그의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건져주셨을 때, 시편 18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분,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십니다.”
2006. 06. 21
382장, 허락하신 새 땅에
여호수아 본받아...
40년 전, 제가 군에 입대했을 때 생각이 납니다. 논산훈련소에서 신체검사를 마치고 난 후 지급된 군복으로 갈아입고서 새로운 내무생활이 시작되었는데요, 일석점호라는 걸 마친 후 자리에 누우니 창으로 보름달이 새어 들어왔습니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며 떠나 온 집 쪽을 향하여 밝은 하늘을 바라보며 고향생각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나팔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옵니다. “따-따따따...”
군대에서는 여러 가지 신호나팔소리가 있습니다. 신호나팔의 음은 단순한 도미솔로 되어 있지만 음의 높낮이와 길이에 따라 그 내용이 다릅니다. 새벽엔 일어나라는 기상나팔소리, 장군이 나타나면 경의를 표하는 신호나팔소리, 누가 전사라도 하면 슬퍼하라는 나팔소리, 진격하라는 나팔소리, 퇴각하라는 나팔소리 등등 각종 신호가 있지요.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그 튼튼한 여리고성 앞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엿새 동안 성 주위를 매일 한 번 씩 돌게 되는데요, 구약성경 여호수아 6장을 보면 그 때의 장면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무장한 군인들이 앞서고, 그 뒤에 양각나팔을 부는 일곱 제사장들이 따르고, 그 뒤에 언약궤가, 그리고 맨 뒤에 후군이 따르며 행진하게 됩니다. 모든 군인들은 침묵하며 따르지요. 일곱째 날이 밝았습니다. 그 날은 다른 날과 달리 성을 일곱 번 돌게 되는데요, 드디어 여호수아 장군이 명령을 내립니다. “외치라”는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팔수가 나팔을 길게 불게 되고, 그 소리를 들은 온 백성들은 크게 소리를 질러 외칠 때에 여리고 성이 와르르 무너지게 되지요. “따따라다따 따따따따따-”(도도 도솔미솔도-) 그 나팔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까? “허락하신 새 땅에-” 이 첫 구절의 동기는 바로 진격나팔소리인 것이죠.
진격나팔소리를 묘사한 DARE TO STAND 이 곡은 미국 일리노이 주 멘도타(Mendota)태생의 복음성가 가수이며 작곡가인 빌혼(Peter Philip Bilhorn, 1865-1936)이 작곡하였습니다. 원래 그의 성은 풀혼(Pulhorn)이었는데 아브라함 링컨이 변호사 시절 지금의 이름인 빌혼으로 개명했습니다. 그는 11살 때 남북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고 시카고로 이주하여 가업인 마차바퀴 제조업을 계승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좋은 목소리를 타고난 빌혼은 여러 모임에 불려 다니며 노래를 했다고 합니다. 1883년, 무디 부흥집회에 초청되었다가 부흥사인 펜테코스트(George Pentecost) 목사님의 설교에 감동을 받고, 그동안의 직업을 버리고 전도단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부흥전도단은 큰 도시, 작은 마을 할 것 없이 이동을 하게 되는데, 이 때의 큰 애로는 많은 짐을 운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덩치가 큰 오르간을 옮기는 것도 큰 문제 거리였는데, 기계를 잘 다루는 빌혼이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간편한 휴대용 오르간(potable organ)을 고안하여 제작하고, 나중엔 오르간 회사까지 설립하게까지 되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 저희 교회에도 이 휴대용 오르간이 있어 즐겨 치곤했는데요, 이는 전도단 뿐만 아니라 항상 이동해야하는 군대에서도 꼭 필요하기 때문에 군종병과의 필수 품목이 되었고, 전시 때인지라 미군부대를 통해 우리 교회에서까지 사용하게 된 셈이지요. 빌혼은 휴대용오르간 제작으로 큰 성공을 하였는데, 그 수익금을 모두 복음전도사업에 바쳤다고 합니다. 그는 1900년 영국 크리스탈 팔레스(Crystal Palace)에서 열린 세계기독교대회에서 4천명 성가대를 지휘했고, 버킹검궁에서도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도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대영광송 1,2번’, ‘영혼의 노래’, ‘평화의 노래’ 등 작곡하여 출판한 수많은 성가집과 복음성가는 1400편이 넘는다고 하는데요, 우리 찬송가에는 이 찬송을 비롯하여 ‘내가 참 의지하는 예수’(86장),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194장), ‘내 맘에 한 노래있어’(468장) 등 네 장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찬송은 로빈슨(C.M.Robinson)이 작시의 동기나 작사자에 관해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단 작사와 작곡한 년대가 빌혼이 무디 부흥전도단의 일원으로 있을 때인 1898년인 것으로 보아서 로빈슨 역시 그 전도단 멤버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이 찬송가에서 마음에 드는 단어는 후렴에서의 ‘여호수아 본받아’입니다. 여호수아 1장 6절이 토대가 되어있는 이 찬송가는 여호수아의 사적을 본받아 우리도 영혼의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자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준비하는 마음(1절)과 담대함(2절, 4절)으로 예수님의 인도하심(3절)을 따라 주님 품에 안길 때까지 계속적인 전진을 하자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가사는 1988년에 언더우드(John T. Underwood) 번역인데요, 후렴 마지막의 영어가사는 이렇습니다.
“Understand, our Promised Land Is the heart of God.”
2006. 07. 04
288장, 완전한 사랑
여기서 나는 행복했고, 사랑했고, 사랑받았노라
지난 주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갔을 때입니다. 저는 고성(古城)을 돌아 괴테가 앉았다던 벤치가 있는 율로스 정원을 들어서며 은행나무를 한참 찾았습니다. 괴테가 앉았다던 벤치 가까이엔 어린 나무가, 조금 떨어진 곳엔 수령이 좀 된 나무가 서 있었는데요, 저는 나무 밑에서 은행잎 하나를 주워 책갈피에 꽂아 넣었습니다. 그 옛날 괴테는 이곳에서 그가 사랑하는 여인 마리안네에게 은행잎을 보이며 이렇게 이야기 했다죠. “이 은행잎은 둘로 갈라진 하나인가, 아니면 하나 안에 결합된 둘인가?” 라고요. 괴테는 이 날 ‘은행잎’이라는 시를 쓰며 글씨 옆에 은행잎 두개를 겹쳐 붙였습니다. 이 후 마리안네는 괴테의 생일에 ‘당신의 생일에 부쳐’란 시를 보냈는데, 이 고성 담 벽에 이 시의 마지막 싯구인 “여기서 나는 행복했고, 사랑했고, 사랑받았노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 아름다운 사랑의 찬송시를 쓴 거니(Dorothy Frances Gurney, 1858-1932)는 영국 런던 태생으로 영국 국교회 목사님의 딸로서 배우 출신으로 나중에 주교가 된 성직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거니 부부는 나중에 가톨릭으로 개종을 했지요. 거니는 어려서부터 문학에 특별한 재능을 타고 나서 두 권의 시집과 명상에 관한 서적도 출판하였는데 찬송 시는 오직 이 한 편 뿐입니다. 이 찬송이 1883년작 이라고 쓰여 있으니까 윈더미어(Windermere)의 풀 와이크(Pull Wyke)에서 살던 25살 때 결혼 전에 쓴 작품입니다. 여동생은 거니보다 먼저 결혼하게 되었는데, 그의 가족들이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둘러 앉아 이 찬송 저 찬송을 부르며 어느 찬송이 좋을까 순서를 의논하다가 ‘힘과 머물음’(Strength and Stay)이란 노래를 부르기로 거의 작정을 했다고 해요. 그런데 거시는 그 찬송의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살며시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노래 가사를 뜯어 고치다가 아예 새로 짓게 되고, 마침내 그 노래가사를 그의 가사로 아주 바꾸어버렸습니다. 이 축시를 짓는데 불과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찬송가 ‘거룩 거룩 거룩’(9장)의 작곡가 다익스( John Bacchus Dykes, 1823-1876)의 곡인 STRENGTH AND STAY에 붙여진 이 찬송가는 이로서 그의 동생뿐 만 아니라 결혼하는 많은 분들의 결혼선물이 된 셈이지요.
이 아름다운 곡조 O PERFECT LOVE는 저 유명한 반비(Joseph Barnby, 1838-1896)경의 곡입니다. 반비는 영국 요크(York)태생으로 어린 일곱 살 때부터 요크 대성당 성가대에 들어가 성가대원으로 교육 받으며 자랐고, 이미 열네 살 때에는 교회 오르가니스트와 교회 성가대 지휘자가 되었다고 하니까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타고난 신동입니다. 런던에 가서 왕실음악원에서 공부한 그는 셜리번(Sullivan)경에게 배우는 등 작곡과 오르간, 합창지휘로 이름나 웨스트민스터 교회를 위시하여 영국의 유명한 성 미카엘교회, 제임스교회, 성 요한 교회, 안드레교회 등 여러 교회에서 지휘를 했고, 246여곡의 찬송가를 비롯해 오라토리오 ‘리브가’ (Rebekah), 시편, 칸타타 ‘주는 왕이시다’ 등 많은 작품을 썼습니다. 반비 합창단을 조직하여 지휘한다든지, 알버트 홀(Albert Hall)에서 합창음악 감독도 하고, 매년 열리는 바하 축제(Bach Festival)을 비롯해 여러 음악축제의 상임 음악 감독으로 ‘마태수난곡’과 드볼작(Dvorak)의 ‘성모애상’(Stabat Mater), 바그너의 오페라 ‘팔시팔’(Parsifal) 등을 영국 초연하는 등 교회음악과 합창 분야에서 대단한 활약을 한 분입니다.
1889년 7월 27일에 죠지 V세의 여동생인 루이스 공주와 파이프(Duke of Fife)공작의 결혼식이 있었는데, 이 결혼식 음악을 맡았던 반비는 이미 불려 지던 STRENGTH AND STAY곡 대신에 자신의 곡으로 바꾸어 연주를 하게 된 이래 바로 이 찬송은 영국왕실의 전통적인 혼례찬송이 되었습니다.
재미있죠? 한 찬송이 먼저 한 여류 시인에 의해 가사가 바뀌어 불리다가 곡까지 바뀌어버렸으니 이제는 원래의 시와 노래는 아주 없어져버린 것 아니겠어요? O PERFECT LOVE란 이름의 이 곡은 SANDRINGHAM이란 곡명으로도 불립니다. 같은 곡조에 제목이 둘인 셈이지요. ‘개편찬송가’(1967년)에 수록된 이래 우리나라에 알려졌는데, 25년 전 저의 결혼식에서도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완전한 사랑’(O perfect Love)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human thought transcending)으로서 그 하나님의 비밀을 바울은 에배소서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이 큽니다.”(엡5;30-32) 2절에서 ‘완전한 사랑’은 ‘온전한 생활’(O perfect Life)로서 유지 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원래 영어 가사는 ‘확신’, ‘부드러운 사랑’, ‘확고한 믿음’, ‘끈기 있는 소망’, ‘마음의 평화’, ‘꿋꿋한 인내’ 등의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우리 찬송에선 단순하게 ‘믿음’, ‘소망’, ‘사랑’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2006. 07. 10
517장, 생명 진리 은혜 되신
예수님처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중략)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 이니라”(마 25;35-40) 지금으로부터 꼭 십년 전 장인어른의 장례식 때 집례목사님께서 봉독하신 말씀입니다. 저의 장인어른 김봉룡 장로님은 6.25전쟁으로 부모를 잃는 수많은 고아들을 그냥 볼 수가 없어, 사재를 털고 여러분들의 도움을 얻어 지리산 기슭 남원에 고아원을 세우고, 갇힌 자들과 가난한 이웃을 위해 이 본문 말씀과 같이 봉사하며 평생을 사셨지요. 줄을 잇는 수백 명의 고아원 출신 문상객들... “아버지! 아버지!” 땅을 치며 울부짖는 소리가 계속 저의 귓전을 치고 있을 때, 제 마음에는 작은 동요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그 분의 뒤를 이어 이 낮은 자들을 위해 평생 몸 바칠 순 없을까. 그 분 집안에 한 식구가 된 것도 그 분의 고귀한 뜻을 이으라는 하나님의 뜻은 아닐까. “제가 가진 것이라곤 보잘 것 없는 작은 콩나물뿐인데, 그 것이라도 쓸모가 있으시다면 바치겠습니다.” 이 후 저는 남원에서 음악을 배우지 못한 교회음악봉사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까하고 종종 그 곳을 찾습니다. 이번 여름도 어김없이 여는 교회음악아카데미 남원세미나(7.17-19)가 열아홉 번째가 되지요.
로우리(Somerset C. Lowry, 1855-1932)목사님이 지은 이 찬송은 “내가 너희에게 행 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는 관련 본문과 같이 원제목은 ‘하나님의 아들, 영원하신 구주’(Son of God, Eternal Saviour)입니다. 이 제목은 영어 찬송가에서 바로 1절과 마지막 절인 4절 가사에 꼭 같이 쓰여 지고 있죠. 이 찬송에 있어서 특별히 눈에 띄는 단어는 2절에 나오는 ‘본’(本, example)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에 앞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날 밤 최후의 만찬 때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는 손수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기시고 하신 말씀이지요. 남 섬기는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 혹시 발 씻을 겨를도 없이 키 재기를 하고 있었던 제자들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이 손수 팔을 걷어 부친 것은 아닐까요? “누군가가 내 발을 씻어줘야 마땅하지.” “내가 무엇이 그들보다 모자라서 저들의 발을 씻어줘야 돼?” “내가 저들의 종인감?” 베드로가 극구 자기 발을 예수님이 씻지 못하게 한 것도 그런 뜻은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의 발을 씻는 법이지. 선생님께 내 발을 맡기다니. 절대로 나만은 그럴 수 없어.” 낮아져 종의 모습으로 사신 주님의 최측근인 그 마저 마지막 날 밤에 이르도록 주님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죠. “무릎 꿇어 낮추어 고통 받는 낮은 자들의 발을 보라. 그리고 그들의 마음으로 발을 만져 주어라. 그들의 키만큼, 아니 그보다 더 발만큼 낮아질 순 없겠니? 부탁한다.”는 간절한 무언의 액션은 아니었을까요?
본보기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면 이 찬송의 가사처럼 이 세상은 사랑으로 채워질 것이고(1절), 주님께서 맡기신 금은보화, 곧 달란트를 맡은 우리들은 충성된 하늘나라백성이 되며(2절), 우리가 소망하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늘나라(3절,4절)가 되지 않겠어요? 주님께서 보여 주신 33년의 삶 모두가 우리 삶의 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찬송을 지은 서머셋 로우리 목사님은 많은 찬송을 쓴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목사님과는 다른 분입니다. 영국의 홈우드(Holmwood)에서 목회를 할 때인 1893년에 지어 이듬해인 1894년 ‘하나님 뜻’(God will)이란 잡지에 발표했는데, 그분이 지은 찬송은 우리 찬송가에 이 한 장만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찬송의 원래 가사는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라도 한번 불러보면 알 수 있듯이 운(韻, rhyme)이 규칙적으로 딱딱 맞아 떨어져 아름다운 맛을 냅니다. 예를 들면 1절과 4절 처음부분에서 grace와 race의 [에이스], plead와 need의 [이드], 2절에서 live와 give의 [이브], sea와 Thee의 [이], 3절에서 Peace와 cease의 [이스]와 pain과 gain의 [에인], 4절 후반에서 one과 done의 [언] 등의 발음에서 시적 감흥이 넘치죠.
IN BABILONE이란 제목의 이 곡조는 네덜란드 민요인데, 로우리 목사님이 작사 발표한 10년 뒤 1904년에 출판된 ‘고금찬송가’(Hymns Ancient and Modern)에 곡이 붙여 수록되었습니다.
저는 이 찬송을 참 좋아합니다. 우리찬송가에는 거의 모든 내용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치중되어 있고,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야할까에 관한 찬송은 극히 드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찬송은 참으로 귀한 찬송이지요. 또 이 찬송은 우리나라 교회에서 잘 불려지지 않고 있는데, 성숙한 신앙인의 차원 높은 찬송이기에 많이 애창되기를 기대합니다.
2006. 07. 17
509장, 거친 세상에서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태풍 에위니아로 인한 피해가 가시기도 전에 온 나라가 연일 계속되는 장맛비로 큰 물난리를 겪고 있습니다.
폭포같이 쏟아 붓는 장대비에 그토록 맑았던 개울은 잔득 성난 흙탕물로 돌변하고 끄떡없어보이던 그 큰 바위들도 굴러내려 많은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길과 집을 망가지고, 강물이 범람하면서 가옥과 논밭이 침수되고, 이 같은 홍수로 많은 주민이 생명과 재산을 잃는가 하면, 고립되어 먹을 것과 식수마저 떨어져 애간장을 태우며 낙심하며 고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무어라 위로의 말을 전할까요? 저도 십여 년 전 제가 모은 전 재산을 몽땅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겪었던 낙심이란 말로 표현 할 수 없었지요. 그런데요, 놀라운 사실은 지나보니 주님께서는 더 좋은 것으로 바꾸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요? 바로 예수님! 예수님이지요. 우리는 가장 어려울 때, 가장 낮은 곳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지요. 저에게 있어 악몽과도 같은 그 사건이 없었다면 아직도 주님을 이토록 기쁘게 찬송할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토록 자랑스럽고 뽐내던 세상 것 다 잃은 뒤에야 주님 만나는 기쁨을 얻게 되었거든요. 얼마나 어려우세요? 주님 손 붙잡으십시오. 분명 주님은 더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로운 찬송은 맥킨니(Baylus Benjamin McKinney, 1886-1952)목사님이 작사하고 작곡도 하였습니다. 미국 루이지아나(Louisiana)주 헬핀(Helfin) 태생인 그는 어린 일곱 살 부터 미국의 경제공황으로 루이지아나의 목화밭에서 많은 식구가 고생스레 일을 했는데요,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움막 같은 집에서도 늘 찬송하면서 예배드리는 신앙적인 가정이었다고 합니다. 맥킨니는 일을 하면서도 자기가 창작한 새로운 멜로디로 흥얼거리며 노래를 해 그의 재능을 나타내 보였는데요, 그는 마운트 레바논 아카데미와 루이지아나 대학을 나온 후 텍사스 주의 남서부 침례교 신학교(South Western Baptist Seminary), 시겔마이어스(Siegel-Myers)음악학교, 시카고의 부시(Bush)음악학교 등 여러 학교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1919년부터 13년간 다시 닥친 경제공황으로 그만둘 때까지 그의 모교인 남서부 텍사스 신학교의 교회음악 교수로 있으면서 로버트 콜맨(Robert H. Coleman)의 음악편집인으로 활동하며 많은 성가를 작사 작곡 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목사안수를 받고 부목사로도 봉직하였으며, 주일학교 위원회 음악 편집인도 하고, 잡지 ‘교회음악인’(The Church Musician)의 초대 편집인도 하고, 교회음악 위원회도 조직하여 총무로 일하는 등 많은 교회음악활동을 하였습니다.
무려 천편이 넘는 찬송을 작사 작곡을 한 것을 비롯하여 ‘승리의 노래집’(Songs of Victory), ‘브로드맨 찬송가’(Broadman Hymnal), ‘찬양의 목소리’(Voice of Praise) 등 많은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평생을 교회학교와 대학에서 교회음악을 가르치고, 찬송가를 작사 작곡하는 일에 전념한 공로로 1942년에는 오클라호마 침례대학교에서 음악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작사 작곡 년대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이 찬송가가 생긴 내력은 대략 이렇습니다. 맥킨리가 텍사스의 남서부 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1923년에 텍사스 주 알렌(Allen)이란 곳에서 주일학교 대회가 있었는데 그 곳에 참석한 맥킨니는 저녁 집회 때에 ‘못 자국 난 상처의 손’(The nail-scarred Hand)이란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선 설교자로부터 구원의 확신을 다짐하는 초청의 음성을 듣게 되었는데, 그 중 “어서 나와 당신의 손으로 그 손의 못 자국을 만지십시오”라는 말에 감동이 되어 영감을 받아 이 찬송의 첫 대목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폭우가 쏟아져 모인 회중들이 서둘러 흩어지고 교통이 두절되어 그는 집에도 못가고 간신히 근처 지인의 집에서 피신하여 있는 중에 그날 밤으로 작사 작곡을 마쳤다고 합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THE NAIL-SCARRED HAND라는 곡명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LUBBOCK이라고 되어 있는 찬송도 있습니다. 이는 맥킨니 목사님이 텍사스 주 러복(Lubbock)에서 썼다고 해서 붙여진 곡명인데, 이는 앞서 작시된 배경이 알려지기 전의 곡명입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맥킨니 목사님의 찬송이 이 찬송 외에 ‘온 세상 위하여’(268장)와 편곡한 찬송으로 ‘내게로 와서 쉬어라’(467장) 등 세장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찬송의 원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폭풍에 시달려 생의 계획이 실패했느냐?”(Have you failed in your plan of your storm-tossed life?) 의심 많은 도마에게 그러셨듯이 계속 우리에게 반복하여 외치십니다. “못자국의 상처 난 손을 잡아라.”
2006. 07. 24
40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작년 초 연세콘서트콰이어 학생들과 함께 미국 순회연주여행 중 그랜드캐년에 들렸을 때입니다. 말로만 듣던 대협곡을 직접 눈으로 보는 순간 입을 떡 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만 년 전 지반이 흔들려 내려앉으면서 생겨난 지층과 단면이 보이고, 거대한 절벽과 계곡, 그리고 여러 모양으로 솟아난 바위는 붉은 색과 주황색을 발하고 있었는데 비추이는 태양 빛에 아름다운 모습을 더 하고 있었습니다. 눈앞에 끝없이 펼쳐지는 무려 120만 에이커나 된다는 그 광활한 광경에 넋을 잃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지막하면서도 아름다운 남성합창의 하모니가 바람결에 들려오지 않겠어요?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동행한 성악과 교수와 남학생들이 대협곡을 바라보며 감동 어린 모습으로 고요히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미국의 국립공원에선 큰 소리를 못 내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도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로움을 바라보며 벅찬 감격으로 우러나오는 찬송이기에 그 곳에 모인 많은 관광객은 물론 경비원들까지도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습니다.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 새삼 확인된 날이었죠.
이 아름다운 찬송 시는 보베르그(Carl Boberg, 1859-1940)목사님이 지은 것인데요, 보베르그 목사님은 스웨덴의 정치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스웨덴의 국교인 스웨덴 복음선교 언약교회(Swedish Evangelical Mission Covenant Church)의 목사님인데요, 이 언약교회는 루터교회의 엄격한 형식주의에 대항하여 자유형식의 예배형식을 주창하여 세운 교단이지요. 미국에서도 시카고에 총회본부를 두고 교육, 선교, 자선, 육영 사업 등 많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찬송가의 곡명인 O STORE GUD는 ‘오 위대하신 하나님’이란 뜻인데, 보베르그 목사님이 지은 찬송의 제목이지요. 보베르그 목사님이 1885년 어느 여름날 소나기가 쏟아진 뒤 맑게 갠 공원을 거닐면서 하나님의 솜씨에 감격하여 이 시를 썼다고 전해지는데, 보베르그 목사님이 살던 스웨덴의 아름다운 산천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울창한 삼림과 거울과도 같이 맑은 호수, 소와 양들이 풀을 뜯는 아름다운 초원, 그리고 상큼한 냄새... 가끔 달력에서 보는 아름다운 북유럽의 자연 경관이 스웨덴 민요인 이 노래와 함께 살아납니다. 우리 찬송에 표기된 운율 11 10 11 10을 세분하면 원래 47 46 47 46 46 44 46 44인데, (우리 찬송가는 47 55 47 55 55 44 55 44로 되어 있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는 11글자 아닙니까? 이를 세분하면 ‘주 하나님’ 4운율, ‘지으신 모든 세계’ 7운율 등등...) 스웨덴의 한 교인이 이 시의 운율과 스웨덴 민요인 이 곡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불렀던 것이 널리 퍼져서 폴란드와 독일, 러시아를 거쳐 미국을 통해 전 세계의 애창곡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찬송가는 1절부터 3절까지는 보베르그 목사님이 지은 것인데, 러시아의 선교사로 가있던 하인(Stuart K. Hine)목사님이 러시아로 번역된 이 찬송을 3절까지 영어로 번역하였고, 1948년 영국으로 귀국한 후 하인 목사님이 4절을 작사하여 첨가하였습니다. 1954년 영국에서 빌리 그레이함 전도대회가 열렸을 때 이 찬송을 주제가로 삼으면서 전 세계 교인들이 애창하는 찬송이 되었고요, 우리나라 역시 80년대 초, 여의도에서 처음 열렸던 빌리 그레함 전도대회 이후 알려지게 되어 찬송가에 수록되었습니다.
관련성구 시 95편 3절 외에도 모든 성경, 모든 찬송이 하나님의 창조와 이 세상을 운행하시는 그의 섭리를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 찬송은 꽤나 스케일이 큽니다. 볼 수 있는 우리의 육안을 넘어 온 우주를 보며, 태초로부터 영원까지 전 인류의 역사를 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까지 넘나듭니다. 자연계시(自然啓示)라 일컫지 않습니까? 조금만 영의 눈을 떠서 주님의 피조물을 보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고, 주님의 계시하시는 말씀이 들리는 듯합니다. 자연을 통해 역사를 통해 사건을 통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죠.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준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준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시 19;1-4)
그런데 우리찬송 번역도 앞의 운율만 빼고 보면 참 잘되어 있습니다. 후렴에서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에서 ‘높’자의 음이 가장 높죠? 원문은 “Then sing my soul” 의 ‘soul’이거든요. 영문보다 더 좋잖아요? 내 영혼이 주님을 높이는 것이 실감나니까요. “내 영혼이 찬양 하네”에서 ‘찬양’의 음도 높아지죠? 원문에선 “how great Thou art!” 의 ‘great’ 이지요. 특별히 마지막에서 페르마타의 가사인 ‘찬양’이 하나님을 가장 높이도록 음표가 최고음에다가 길게 내뿜을 수 있도록 페르마타를 붙여 놓았지요? 제가 늘 강조합니다만 음화(音畵, word painting)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가사이지요. 이 찬송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스웨덴 민요를 미리 준비시키셨던 것 같아요. 자 이제 신비롭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로 여행해 볼까요?
2006. 08. 04
523장, 나 형제를 늘 위해
원수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지휘하던 어느 교회성가대에서 사사건건 저를 몹시 괴롭히는 대원 한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든 성가대원들은 저의 지휘에 재미있게 따르며 밝은 얼굴로 은혜롭게 노래했지만, 그들은 저의 무엇이 그리도 못마땅한지 찬양할 때에도 굳은 얼굴을 짓고, 시시때때로 저를 비방하곤 했습니다. 저는 어느 대원 한사람도 빠짐없이 서로 잘 사귀며 가족같이 화목하게 지내기를 바랐고, 이를 위해 늘 기도하곤 했었거든요. 그런데 제 마음 가운데에는 언제나 그분들이 걸리고, 부담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지휘자인 제가 대원과 불화한다면 되겠습니까? 저는 저를 미워하는 그분들을 위해 매일 새벽마다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저를 좋아하게 해 달라고요. 그것도 기도 첫머리에... 며칠이나 기도했을까, 저의 마음 가운데 주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원수를...”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주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원수가 있어야 사랑할 것 아니겠어요? 그 때에 저는 벅찬 감격을 느끼며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저에게 원수(?)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을 사랑하라고 저에게 원수(?)를 보내 주셨군요.” 그 날로부터 저는 그들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맡기신 숙제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얼마나 지났을까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를 대적하던 그들의 마음이 눈 녹듯 녹아져 언제 미워했나싶을 정도로 저를 좋아하게 되고, 제가 지휘하는 동안 얼마나 좋은 대원으로 저를 잘 도와주었는지요. 지금껏 친구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 찬송의 작사자 월터(Howard Walter, 1883-1918)목사님은 미국 코네티컷 주 뉴브리튼(New Britain)태생으로 프링스턴 대학을 비롯하여 하트포드(Hartford)신학교, 글래스고의 에딘버러 대학, 괴팅겐 대학 등에서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회중교회 목사안수를 받고, 미국 아시럼힐(Asylum Hill)교회 부목사로 목회도 했지만 선교사역에 더 큰 뜻을 품고 선교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특별히 극동지역에 관심이 있어서 일본과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열심히 헌신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원래 심장이 약하여 자주 마비 증세를 보였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을 돌보지 않고 너무 열정적으로 헌신한 나머지, 35년의 짧은 생으로 순교적 삶을 살다간 분입니다.
이 찬송 시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월터 목사님이 일본 선교사로 파견되어 와세다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을 당시인데요, 그러니까 그의 나이 24세 때인 1907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새해의 다짐을 담아 ‘나의 신조’라는 제목으로 시를 썼습니다. “나는 진실하리라.(I Would be true,)... 나는 정결하리라.(I Would be pure,)... 나는 강건하리라.(I Would be strong,)... 나는 용감하리라.(I Would be brave,)... 나는 친구가 되리라.(I Would be friend,)... 나는 주리라.(I Would be giving,)...” 등 바로 우리 찬송가의 1,2절 가사인 여덟 가지의 신조를 적고, 그렇게 살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 내용을 미국에 계신 그의 어머니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는데, 그의 어머니는 이 시가 너무 좋아서 ‘하퍼의 자선시’(Harper''''s Bazzar)지에 보내 출판케 되므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지요. 이 후 월터 목사님은 4개의 다짐을 추가하여 지금의 3절 찬송 시를 완성시켰고, “I would be...”로 시작되는 12개의 다짐이 모두 완성된 것입니다. 12는 완전수이기도 하지요.
이 찬송의 곡명이 PEEK로 되어 있지요? 이것은 작곡자인 피크(Joseph Yates Peek, 1843-1911)의 이름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이 피크라는 분은 악보를 보고 노래할 줄도 모르고, 들리는 음도 적을 줄도 모르는 그야말로 음악에 문외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작곡했냐고요?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음악성 덕분이죠. 그는 1709년, 월터 목사님으로부터 낱 장 으로 된 ‘나의 신조’를 받게 되었는데 너무나 그 내용이 좋아 매일 읽고 다짐하다보니, 4 7 4 6으로 된 운율에 그냥 새로운 멜로디가 솟아나 붙게 되어 외우게 되었답니다. 마침 찬송인도자이며, 성악가이고, 오르가니스트였던 튤라(Grant Colfax Tullar, 1869-1950)목사님이 피크가 외워서 부르는 자작 찬송을 듣고, 그 자리에서 받아 적어 악보화(樂譜化)시키고 화음까지 붙여 말쑥한 곡이 탄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문맹인 사람으로부터도 시를 쓰게 하시고, 악보를 못 읽는 음맹(音盲)으로부터도 작곡하게 하시니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찬송가 중 크리스챤의 진정한 삶을 노래하는 드문 내용이기에 저는 이 찬송을 매우 귀하게 여깁니다. 사도바울이 옥중에서 기독교인들이 가질 대표적인 덕목들을 열거하며 빌립보 교회에 보낸 권면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십시오.”(빌 4;8-9)
2006. 08. 09
261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
‘해방만세’를 외치면서 날뛰며 좋아하는 모습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소식을 들은 민중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얼싸 안고 “해방만세”를 외치는 오래된 흑백 사진들을 보면 볼 때마다 언제나 가슴이 뜁니다. 일왕 히로히토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연합군에게 항복을 발표하자마자 어린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기뻐 뛰며 환호하는 국민들... 만나는 이마다 서로 부둥켜안고 목이 터져라 ‘해방만세’를 외치면서 날뛰며 좋아하는 모습들...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나와 ‘해방만세’를 외치는 출옥애국인사들과 이를 기뻐하는 가족들과 환영하는 시민들의 모습들... ‘축 해방’, ‘민주정권수립’, ‘조선독립만세’, ‘Welcome’ 등 커다란 피켓을 들고 벅찬 가슴을 쓸고 있는 대학생과 민중들... 비록 빛바랜 사진들이지만 6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흥분시킵니다. 매년 이 때마다 봐오는 일이지만 이만한 역동적인 사건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 찬송의 작사자는 함경북도 경흥 태생이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 1901-1990)목사님입니다. 그는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부를 나온 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일제 강점하였던 때인 1932년에 귀국하여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교사로, 만주 용정(龍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서 교목으로도 일 했지요. 김 목사님은 조선인은 조선인의 손으로 양육되어야 하고, 신학교 역시 조선인의 손에 의해 세워져야한다는 생각으로 1940년 조선신학교를 설립하였는데요, 이 신학교는 약칭 장로교단의 기장(基長)으로 불리는 대한기독교장로회 교단 신학교인 지금의 한국신학대학교의 전신입니다. 이곳에서 평생 교수를 거쳐 학장까지 역임하였습니다. 김 목사님은 한국교회개혁비전을 제시한 선각자인데요, 1940년대 말부터 우리 한국교계에서 소용돌이 친 보수신학과 소위 신신학(新神學)으로 불리는 자유주의 신학과의 논쟁이 있었고, 그로 인해 결국은 교계가 나뉘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는데, 그 일선에 계셨던 한국교회의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를 ‘자유주의 신학의 기수’로 불리고,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비롯하여 정부를 상대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여 ‘행동하는 신앙인’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이 찬송은 원래 1966년 대한기독교장로회 제50회 총회가 열렸을 때 ‘총회 기념가’로 만들어졌는데, 이때의 곡은 당시 연세대 교수인 나운영 장로의 작품으로 불렸지요. 이 곡은 ‘청년찬송가’에 수록되었다가 1967년 ‘개편찬송가’가 편찬되면서 이동훈 교수의 곡으로 바뀌어 수록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원래 기장 총회를 기념해 만들어진 만큼 원래 찬송제목도 ‘교회’인데요, 교회가 영혼구원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국가에 올바른 의식을 가지고 기독교적 국가관과 사명을 가져야겠다는 그분의 철학이 이 찬송에 담겨있습니다. 김 목사님은 이 찬송이 애국가와도 같이 온 국민에 불려지기를 바랐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도 지금은 국가기념일마다 교회에서 애창되고 있지요.
이 찬송은 1929년 4월 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타고르의 시 ‘동방의 등불’을 연상케 합니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동아일보 기자로부터 한국방문을 요청받고 응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을 소재로 이 4행시를 기고한 것입니다. 일제 강점 하에 있던 우리 국민들에게 희망을 잃지 말고 꿋꿋이 독립을 이루기 바라는 마음에서 보낸 격려의 시인 것이지요.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될지니.”(주요한 번역)
이 곡은 ‘개편찬송가’ 편찬 시 그 편찬 위원이었던 이동훈(李東勳, 1922-1974)선생님에게 위촉하여 작곡되었는데요, 이동훈 선생님은 바이올리니스트이면서 훌륭한 합창지휘자였지요. 그분이 활동하던 1960년대는 우리나라 아마추어 합창음악의 전성기라 할 만 한데요, 대한합창단(나운영 지휘), 서울코랄(박재훈 지휘), 성종합창단(곽상수 지휘), 시온성합창단(이동일 지휘), 아가페합창단(김두완 지휘), 필그림합창단(이동훈 지휘), 한국오라토리오합창단(박태준 지휘) 등 등 앞 다투어 선의의 경쟁을 하며 활동을 하고 황무하기 이를 데 없는 교회음악계에 발판을 마련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찬송가 작곡가들 거의가 이 합창단들을 지휘하며 외국의 유명한 오라토리오나 칸타타, 그리고 교회 성가대를 위한 찬양곡(Anthem) 등을 번역 발표, 출판하고,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흑인영가 등을 연주함으로 고도의 합창기법을 구사하고, 그들이 직접 작곡한 성가들을 합창단을 통해 발표하므로 그의 창작열도 불태우곤 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성가대가 이렇게 세계에 자랑할 만큼 훌륭하게 성장한 것도 이들 선구자들의 개척자적인 헌신에 비롯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이 찬송과 ‘가슴마다 파도친다’(303장),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461장) 등 그의 찬송이 세편 수록되어 있습니다.
2006. 08. 16
278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내가 진정 누굴 사랑한다면
올림픽 조각공원에 가면 날개달린 채색된 평화의 문에 들어서자마자 맞들어 닥치는 거대한 돌조각 작품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고개를 숙여 얼굴을 맞대고 있는데요, 마치 옆 사람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듯도 하고, 서로 가만히 속삭이는 듯 사랑스런 모습입니다. 저는 처음엔 참 좋은 작품이구나 하고 무심코 지나치곤 했는데, 어느 날 자세히 보니 그 밑 둥이 네 조각으로 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까? 매일 아침 그 곳에 산책을 하며 그 작품을 보아왔으면서도 밑 둥 깨어진 것은 못 보고 지나치곤 했었거든요.
저는 그 날 그 작품 앞에서 이 조각가는 이 돌 작품에서 왜 밑 둥을 깨뜨려 만들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윽고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상체만으로 표현된 그 작품의 재질은 딱딱한 돌이 아닙니까? 각기 서있는 돌사람 둘이 서로 가까워지기 위해선 자기 자신이 서로 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겠지요. 내가 누굴 진정 사랑하려면 먼저 나 자신이 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선 그 작품의 제목을 보니 과연 ‘대화’(Dialogue)라고 적혀 있지 않았겠어요?
이 찬송의 작사자 몽고메리(J. Montgomery, 1771-1854)는 스코틀랜드 얼빈(Irvine)에서 모라비아교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여섯 살 때 그의 아버지가 서인도의 바바도스 섬에 선교사로 사역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어 제빵공장을 전전하며 고생을 하며 불우하게 자랐습니다. 그래도 몽고메리는 문학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 청년이 되면서 주간신문 ‘쉐필드 레지스터’(Shefield Register)에 직원으로 들어가 종래는 그 신문의 최고 경영자가 되었고, 신문의 제호도 ‘아이리스’(Iris)로 바꾸어 운영을 했는데, 이 신문은 영국 국민이 애독하는 인기 있는 신문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이 찬송은 그가 쓴 장편 시 ‘영광스러운 우주’(The Glorious Universe Around)에서 4연에서 6연까지 발췌하여 만든 것이라는데요, 영국 찬송의 원문 처음은 “사랑의 띠로 하나된 형제”(In one Fraternal bond of Love)로 시작됩니다. 그의 찬송가는 우리 찬송가에 ‘거룩하신 하나님’(10장), ‘영광나라 천사들아’(118장), ‘새 예루살렘 복된 집’(225장), ‘시험받을 때에’(443장), ‘이 곤한 인생이’(536장), 등 6곡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TOWNER인 이 곡조는 미국의 위대한 찬송작곡자인 타우너(Daniel Brink Towner, 1850-1919)의 이름이지요? 타우너는 그의 아버지가 음악교사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음악에 접하게 되었고, 목소리가 좋아 17살 때부터 이미 바리톤 가수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여 후에는 이름난 오라토리오 가수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자기보다 몇 십 년 연배인 루트(G.F.Root,1820-1895)나 웨브(G.J.Webb, 1803-1887) 같은 당대 뛰어난 찬송작가를 따라다니며 함께 활동을 하게 되면서 그들로부터 음악 레슨도 받게 되고, 평생 막역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35세 때부터 무디의 선교 동역자가 되어 후에 무디성경학교의 음악과장까지도 지내고, 테네시주립대학에서 음악박사학위도 받았지요. 우리 찬송가에는 이 찬송 외에 ‘놀랍다 주님의 큰 은혜’(137장),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497장) 등 3장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찬송의 특이한 점은 ‘주님’을 노래하기 전에 ‘형제자매’를 먼저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께 나아오기 전에 형제와 화해하고 나올 것을 당부한 말씀이고 보면 형제사랑을 강조한 첫 절은 타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주님 안에서 한 띠로 묶여진 믿음의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살자는 내용의 이 찬송은 1절 처음부분에 관련 성구가 그대로 요약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행 2;46-47상) 곧이어 ‘본’(本, example)이란 단어가 눈에 띠는데요, ‘본’이란 단어를 보니까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생각나는군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바로 주님이 직접 제자들 앞에서 종의 모습으로 발을 씻으신 모습을 2절에서 상기 시키고, 3절에선 성찬(聖餐)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눈 사랑의 띠로 묶여진 한 형제의 끈끈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3박자의 2부 합창(Duet)은 형제자매 간의 사랑의 띠, 그리스도와 우리의 사랑의 띠를 상징하는 듯하고, 4박자의 합창(Chorus)은 굳건히 주님의 본을 실천하자는 결의를 나타낸 듯합니다.
2006. 08. 24
38장, 주의 영광 빛나니
모세의 노래 와 미리암의 노래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악을 사용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들의 예배 의식에서 사용되었고, 이는 그들 국가와 민족의 생활과 더불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한 예로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를 들 수 있는데, 이집트인의 속박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무사히 건너고 나서 함께 찬송을 부르지요. 이 시기 다른 나라의 노래들은 다양한 소재를 가졌지만 유독 히브리노래들은 오로지 하나님께 경배하는 데만 거의 사용되었고, 이는 다음 세대를 위한 모범의 역할도 어느 정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노래)의 목적이 고상하고, 영감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시(노래) 자체를 거의 신성하게 여기기까지 하였습니다. ‘모세의 노래’(출 15;1-18)도 모세가 이끄는 남성합창과 그의 누이가 이끄는 ‘미리암의 노래’(출15;19-21), 즉 여성합창이 번갈아 노래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히브리 창의 양식인 화답창(和答唱, antiphonal singing)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미 154장과 233장에서 응창(應唱, responsory)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만, 응창은 독창자와 합창의 교창(交唱)방식을 말하고, 화답창은 합창과 합창의 교창방식을 말합니다.
작사자 라이트(Henry Francis Lyte, 1793-1847)목사는 스코틀랜드 에드남(Ednam)지방의 작은 마을 켈소(Kelso) 태생으로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후 라우어 브릭스햄(Lower Brixham), 디본셔(Devonshire) 같은 교구를 맡으면서 주로 어촌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평생 천식과 폐결핵을 앓으면서도 병약한 몸을 이끌고, 드센 어부들을 상대로 이십여 년 간 사역을 하였는데요, 지병으로 인해 가냘픈 체구와 창백한 얼굴을 가지고서도 목회를 하며 많은 찬송 시와 기도문을 남겼지요. 그가 지은 찬송으로는 우리 찬송가에 이 찬송과 ‘내 영혼아 찬양하라’(19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367장),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531장) 등 4편이 들어 있습니다.
악보 왼편 위를 보면 작시 년도가 나와 있지요? 이 찬송은 1834년에 시편 150편을 의역해서 그가 저술한 ‘시편의 영가’(Spirit of Psalms)에 실어 발표했습니다. 이 찬송이 ‘메기고 받는’ 형식의 노래로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원래의 시에는 받는 부분의 “할렐루야”는 없었고, 쭉 이어진 8행시인 2절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지금의 곡에 맞추게 되면서 ‘할렐루야’를 삽입하게 된 것이지요.
시편 150편이 ‘할렐’시편이고 보면 더 잘되지 않았습니까? 1절은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송할 찌어다”를 의역한 것인데, 영어찬송가에서 ‘show’, ‘below’에서 끝음절이 [오우]로, ‘above’, ‘love’엔 [어브]발음으로 시의 맛을 더 하고 있습니다. 2절은 시편 150편 2절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 찌어다”의 내용인데, 여기에서도 ‘earth’, ‘worth’에서 [어스]로, ‘shore’, ‘evermore’의 [오]발음으로 되어있고, 3절에서도 ‘trace’, ‘grace’에서 [에이스]로, ‘done’, ‘Son’에서 [언]으로 맞추고 있습니다. 영어찬송으로 불러보시면 그 아름다움을 더 느끼게 될 것입니다. 3절 가사는 시편 150편 6절을 내용으로 한 것인데, “호흡이 있는 자들아 여호와를 찬양할 찌어다. 할렐루야”로 되어있지요. 이러한 배경을 무시한 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성도들과 천사들이 찬양하는 내용만으로 요한계시록 4장 8-11이 표시된 관련 성구로만 본다면 시편가(詩篇歌, Psalter) 전통에서 발전된 영국찬송은 접어두고 부르는 셈이지요.
곡명 LLANFAIR의 작곡자 윌리엄스(Robert Williams, 1781-1821)는 북 웨일즈의 앵글시(Anglesey)섬의 미니드 이텔(Mynydd Ithel) 태생인데요, 소경으로 태어나서 바구니를 엮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평생을 섬에서 보낸 보통 교인입니다. 그래도 목소리가 아름답고, 앞을 못 보면서도 음악을 듣고 받아 적는 청음(聽音)실력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이 찬송도 윌리암스가 지은 것이 아니고 오래 전부터 전래되어 내려오는 멜로디를 그가 적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곡조는 처음 BETHEL이라는 곡이름으로 1817년에 발표되어 챨스 웨슬리의 ‘구주 부활하신 날’(개편 144장)에 붙여 사용되어 왔는데요, 1906년 ‘영국찬송가’(England Hymnal)에 이 찬송가사로 수록되면서 제 짝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찬송은 같은 악구(樂句, phrase)가 여러 번 반복되지요. 음악의 형식으로 볼 대, 1-4마디(주의 영광 빛나니 할렐루야)는 처음 등장하는 멜로디이기에 A(5-8마디, 13-16마디도 멜로디가 같아 A), 9-12마디(보좌 앞에 천사도 할렐루야)는 두 번째로 등장하는 멜로디이기에 B라 할 때 AABA의 두 도막 형식이 되지요. 이런 노래는 언급한 바와 같이 화답창으로 부르기에 적합합니다. 예를 들자면 1-4마디는 여성만, 5-8마디는 남자, 나머지는 다함께 부른다든지, 아니면 응창으로 본다면 1-2, 5-6마디는 독창으로, 3-4, 7-8마디의 ‘할렐루야’는 다함께 불러 메기고 받는 히브리 창법을 살려 재미나게 부를 수도 있습니다.
2006. 09. 04
30장,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역대 상 15장과 16장을 보면 엄청난 규모의 찬양대가 동원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통치하던 시절, 성전도 짓지 못한 상태인데도 장막 속에서 행해지는 예배는 매우 장엄하고, 그 노래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레위인 성악가로 구성된 찬양대와 관현악단의 인원이 4천명에 이르렀는데요,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찬양으로 드리는 예배를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때에 교회음악을 이끌던 아삽은 기악지도자, 그나냐는 성악지도자로 보여 지며, 당시의 찬양대는 크게 헤만과 아삽과 에단의 세 파로 나뉘어지는데(대상 15;17), 이때의 음악가들은 연주자이면서 작곡가였고, 동시에 시인들이었기에 많은 시편들이 이들의 작품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시는 솔로몬시대에 이르러 성전예배에서 빛을 발하게 되고, 이 찬송들은 대를 이어 유대인 학교에서 정규적인 과목으로 가르쳤고, 이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시인이고, 모두 음악가인 셈이었죠.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찬송을 부르신 기록이 딱 한번 나옵니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고 나서 찬송을 부르며 감람산으로 갔다고 했는데요,(마26;30, 막14;26) 과연 이 때 부른 찬송은 어떤 찬송이었을까요? 멜로디는 어땠을까요? 시간은 꽤 지났지만 우리 찬송가 중에선 이 찬송이 가장 그 때 분위기에 가깝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히브리 노래이니까요.
유대교에는 익달(Yigdal)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찬송의 곡명이 YIGDAL이기도 한데요, 익달이란 12C 유대교 학자인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1130-1205)가 유대교 신조 13개 항을 구성해서 정리한 것을 이 찬송가의 작시자로 표기된 14C 랍비인 유다(Daniel Ben Judah)가 운율 시로 만들어서 유대교 예배 찬송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교 예배를 살펴보면, 먼저 감사기도로 시작해서 십계명을 암송하고, 신명기 6장 4-9절을 봉독한 다음에 제사장의 축도가 있고, 제물을 드리는 1부 예배가 있고, 곧 이어서 2부로 찬양하는 음악예배순서로 들어가는데, 회당에서 먼저 선창자(先唱者, Cantor)가 익달을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익달은 유대교 예배뿐 만 아니라 매일 아침 하루 일과를 시작하면서 부르고, 저녁에도 불렀다고 하는데, 이 익달이 우리 기독교 찬송가에 들어온 경위는 이렇습니다.
영국의 올리버스(Thomas Olivers, 1725-1799)목사님이 런던에 있는 유대교 회당에 들어가 예배에 참석했다가 익달을 듣고 감명을 받아 12절의 가사로 만들어 현재와 같은 찬송으로 만들었지요. 상당히 가사가 길죠? 당시의 찬송은 모두 가사가 길었습니다. 오죽하면 챨스 웨슬리(Charles Wesley)가 찬송 부르는 법을 설명하면서 “찬송이 혹 십자가가 되더라도 끝까지 불러라”라고 했을라고요. 그 날 회당에서 노래 부른 선창자(先唱者, Cantor)의 이름이 레오니(Meier Leoni)였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YIGDAL (LEONI)이라고 했습니다. 올리버스 목사님은 몽고메리셔 태생으로 4세 때 고아가 되어 어렵게 자라나 구두제조 기능공으로 생활하면서 젊은 시절엔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요, 저 유명한 부흥사 휫트필드(George Whitefield)목사님이 인도하는 부흥집회에 참석했다가 회개하고 새사람이 된 후 목사가 되어 25년간 영국과 아일랜드 등지를 누비며 전도사역으로 일생을 보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 찌니라.”
신명기 6장에서 모세가 교훈한 핵심 되는 내용과 그 정신은 ‘여호와를 사랑하라’이지요.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그 분의 말씀을 순종하라는 것과 나아가 그 모든 말씀을 오고 올 후손들에게 철저하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내용을 이 찬송의 바탕에 깔고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우러러 불러야 할 것입니다.
로드스(Joseph Rhodes)가 익달의 멜로디를 정리하고, 화음을 붙이는 등 편곡한 이 곡은 우리 찬송가에 몇 안 되는 단조(單調) 노래입니다. 아무래도 단조 노래는 장조(長調)에 비해 무게가 있는데요, 특히 처음 “여호와 하나님”하며 시작하는 모티브가 상행하므로 하나님 보좌 앞으로 올라가는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상행하는 멜로디는 둘째 단 “온 천하 만민 주”라든가 마지막에 “그 거룩하신 이름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긴 가사를 4절로 요약이 되었습니다만 우리 찬송가에선 1,2절은 성부 하나님, 3절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 4절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 ‘아멘’에서 파카디 화음(Picardy chord, 단조 곡에서 장3화음으로 마침)로 더욱 종교적 감흥을 더 합니다.
2006. 09. 12
533장,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
밤이나 낮이나 주님생각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잡혀 갔을 때, 그들을 지배하던 바벨론 사람들은 히브리인들이 수준 높은 음악 실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이 부르는 시온의 노래를 듣고 즐기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사 때마다 히브리인들에게 연주 해 줄 것을 부탁하고, 종용했지요.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매번 완강히 거부되었고, 그로 인해 그들에 대한 핍박은 더 해갔던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불우한 환경과 가련한 상태에서 이방들뿐인 청중 앞에서 연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좋은 악기는 늘 줄이 풀린 채 방치되었고, 저들의 노래는 결코 불려 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강변에서 지은 시편 137편을 보면, 그들이 이방인들 앞에서 연주를 하게 된다면 “손이 말라 비틀어져 지고, 노래하는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라”고 하면서 그들이 가진 재능까지 썩혀 버릴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이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오자 저들은 기뻐 뛰며 잃어버렸던 옛 찬송들을 다시 기억해 내고, 다시 찾아내고, 새로이 작곡하고, 연습하고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크리스챤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며, 언제나 그의 숨결과 동행하심을 느끼고,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천국생활을 하고자하는 깊은 신앙의 이 찬송은 아일랜드에서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8C 경의 고전적인 찬송 시입니다. 너무도 아름답죠? 아일랜드의 여류 문학가인 버언(Mary Elizabeth Byrne, 1880-1931)은 산문(散文)으로 된 이 고대 아일랜드어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여 1905년 ‘에린’(Erin)이라는 일간지에 발표했는데, 이를 역시 아일랜드 여류 문학가인 헐(Eleanor Henrietta Hull, 1860-1935)이 1912년에 이 민요멜로디에 노래할 수 있도록 55645555의 운율 시로 만들어 ‘게일의 시집’(Poem Book of the Gael)에 발표하였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는 성 프란시스의 기도문이나 어거스틴의 참회록 같은 잘 알려진 기도문 외에도 크고 작은 아름다운 시나 기도문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의 부패상에 항거하여 다소 과격했던 개혁자들에 의해 성소의 엄숙미를 유지해 왔던 시와 음악과 예술품등 소중한 기독교 유산들을 소홀히 여겨 잘 보존되지 못하고 소멸돼 버렸지만, 근래에 이르러 예배회복운동과 더불어 옛 유산들에 관한 관심과 함께 되찾는 운동이 여기저기서 일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아이오아회가 아이오와 고도에서 파괴된 중세 수도원과 예배당을 수리하고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일이라든지, 20C 들어 미국의 장로교를 비롯하여 침례교, 감리교, 조합교회 등의 교단들이 옛 형상들이나 상징을 찾아 교회에서 되 사용하려는 경향은 예배를 보다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도 십자가나 촛대, 의상, 제단 등 성전에 대한 경외심이 점증하고 있고, 예배 시에 공동기도문도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이 찬송은 그 의미가 매우 크지요.
아름다운 이 멜로디 SLANE은 쓰여 있는 바와 같이 ‘길에서 사랑을’(With my love on the road)이라는 아일랜드 민요인데, 1900년 죠이스(Pattrick Joyce)의 ‘고대 아일랜드 민요와 노래집’(Old Irish Folk Music)에 실린 것을 웨일즈의 음악가인 에반스(David Evans, 1874-1948)가 화음을 붙여 1919년 ‘아일랜드 찬송가’에 이 가사의 곡으로 처음 실렸습니다. 우리찬송가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작곡한 나운영(羅運榮)장로님이 4부 화성으로 편곡한 것이죠.
저는 이 찬송에서 “밤이나 낮이나 주님생각”이 제일 마음에 드는 구절입니다. 누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앉으나 서나, 걸을 때나 잘 때나 순간순간마다 연인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연인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죠. 우리는 신부, 주님은 신랑이라고... 그래서 이 찬송은 사랑에 겨운 주님생각으로 꽉 들어 차 있습니다. 2절에서 “주님! 내 안에 들어와 계세요. 주님 안에도 제가 있지요?” 3절에도 보면, 주님 생각으로 가득한 나에게 세상 무엇이 귀하게 여겨질까요? 그래서 4절에서 노래합니다. 이제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주님만이 내 기쁨, 주님만이 내 소망이 되게 해달라고 기원합니다. 그래서 원어 찬송을 보면 주님을 향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나의 비전’(vision), ‘주님은 내 최고의 생각’(best thought), ‘주님의 나의 빛’(light), ‘주님은 나의 지혜’(wisdom), ‘주님은 참된 말씀’(true word), ‘주님은 아버지’(great Father), ‘주님은 나의 유업’(inheritance), ‘주님은 내 마음의 제일 먼저이신 분’(first in my heart), ‘주님은 하늘의 왕’(King), ‘주님은 나의 보화’(treasure), ‘주님은 승리자’(victory own), ‘주님은 태양’(sun), ‘주님은 내 마음의 마음’(heart of my own heart), ‘주님은 통치자’(Ruler)등등 다윗과 같이 고백하지요.
이 노래는 우리나라 민요 같은 분위기여서 퍽 친근감이 듭니다. 9째 마디를 제외하곤 5음 음계로 되어있고, 헐렁거려서 매우 국악적이죠. 그래서인지 부르면 부를수록 맛이 납니다.
2006. 09. 19
29장, 성도여 다 함께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성경에서는 솔로몬성전예배가 역사상 하나님께 드린 모든 예배 중에 최고로 경건하였고 아름다웠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는데, 과연 예수님 당시의 예배는 어떠했을까요? 역시 으리으리하게 잘 지었던 헤롯성전에서 드린 예배 말입니다. 여러 가지 기록으로 살펴볼 때 솔로몬 시대의 예배만은 못해도 그 의식이 대단히 정교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레위 인들로 선택된 소위 ‘노래하는 데 익숙한 자’로 이루어진 성가대는 주로 남자들과 소년들로 구성되었는데, 여자들도 가끔 노래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절기 때마다 노래하는 곡이 지정되었었는데, 첫째 날은 시 24편, 둘째 날은 48편, 셋째 날은 82편, 넷째 날은 94편, 다섯째 날은 81편, 여섯째 날은 93편, 일곱째 날은 92편 등이 선곡되었고, 축제나 특별한 날에도 연주하는 곡들이 지정되어 있었지요.
이 모든 것은 ‘축제의 큰 날’(Great Day of the Feast)이나 ‘대 호산나일’(Great Hosannah)인 성전축제의 마지막 날에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 때 성가대는 시편 82편을 부르며 회중을 인도하고, 또 제사장들이 간간이 나팔을 불면, 회중은 무릎을 꿇어 엄숙히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라면서 이와 같은 노래를 배우셨을 것이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여러 번 찾은 성전에서 이러한 노래들을 듣고, 산이나 바닷가를 거닐면서 제자들과도 함께 불렀으리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찬송을 불렀다는 기록은 성경에 단 한 절뿐인데, 바로 유월절 만찬 후에 불렀다는 이 찬송은 아마도 ‘할렐’(Hallel)의 마지막 부분(시 95-98편)이나 시편 136편일 것이 아닐까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시편 136편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후렴구를 가진 응창(應唱, responsory)형식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은 응창 형식의 곡을 소개할까 합니다.
이 찬송은 베이트맨(Christian Henry Bateman, 1813-1889)목사님이 원래 어린이를 위한 찬송으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 찬송가 가사에 ‘성도여 다 함께’는 애초에 ‘어린이여 다 함께’로 불렸는데 후에 ‘어린이’(Children)를 ‘성도’(Christian)로 살짝 바꾸어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 부르는 모든 이들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베이트맨 목사님은 영국의 할리팍스(Halifax) 근교 와이크(Wyke) 태생으로 모라비아 교단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목사가 된 후에 교단을 회중교회로 옮겨 에딘버그의 플라코(Placo)교회, 요크셔의 호프톤(Hopton)교회, 버크셔의 리딩(Reading)교회 등지에서 사역했습니다. 영국 국교회 목사로 져지의 성 누가교회에서도 목회를 하였고, 군목으로도 봉사했습니다. 그는 많은 찬송시를 남겼는데, 특히 어린이 찬송을 많이 썼습니다. 그의 작품이 우리찬송가에는 이 한편만 수록되어 있는데, 이 찬송은 1843년 ‘어린이를 위한 성가집’(Sacred Melodies for Children)에 5절가사로 실렸고, 1872년에는 그가 지은 ‘어린이 찬송가’(Children''''''''s Hymnal)에 발표되었습니다.
이 찬송의 곡조 이름이 스페인의 수도인 MADRID이지요? ‘마드리드’란 스페인 민요가 있는데, 웨일즈 태생의 이반스(David Evans, 1874-1948)가 이 민요를 편곡해서 이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이반스는 웨일즈와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한 카디프(Cadiff)대학의 교수인데요, 교향곡을 위시하여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을 뿐만 아니라 찬송도 많이 작곡하였습니다. 이반스는 당시 웨일즈의 대표적인 음악가로서 작곡뿐만 아니라 지휘도 했는데요, 교회음악의 토착화에 관심을 갖고 웨일즈적인 멜로디를 찬송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 찬송가집인 ‘교회찬송’(Church Harmony)을 편집하는 등 매우 교회음악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제가 어린이주일학교 교사를 하던 청년시절에 이 찬송이 ‘주일학교 찬송가’에 처음 소개되었었는데, 당시 어린이들이 너무 좋아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재미나게 가르치며 부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대학 신입생시절이라 아직 히브리 시편창(詩篇唱, Psalmody)에 대해 배우지 못해 잘 모르면서도 이 노래가 우리나라의 ‘쾌지나칭칭나네’처럼 ‘메기고’ ‘받는’ 구조라 재미있게 생각하고 “성도여 다함께”는 여자어린이들이, “할렐루야 아멘”은 다함께 “주 찬양 하여라”는 남자어린이들이, 교사나 어린이들의 독창으로, “할렐루야 아멘”은 다함께, 이런 식으로 인도했었거든요.
그러다가 히브리 사람들이 시편을 노래하는 방식이 세 가지, 즉 처음부터 끝까지 독창이나 제창으로 부르는 직영창(直詠唱, psalmus in directum), 독창과 제창이 주고받는 응창(應唱, cantus resposorialis), 두 개의 합창단이 양 편으로 나누어 서로 주고받는 교송(交誦, antiphonalis)이 있다는 걸 알고 난 다음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노래하는 민속음악방식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고 매우 신기하게 여긴 적이 있습니다.
라틴어에 ‘코람 데오’(Coram Deo)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란 뜻인데요,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계19;4)의 표기된 관련 성구와도 같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부르는 좋은 찬송입니다.
2006. 09. 26
2장, 4장, 성부, 성자, 성령께
하나님께 영광, 사람들 중에 평화
예수님을 따라 함께 살던 제자들과 그때의 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도 얼마동안은 유대인들에게서 물려받은 찬송을 그대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성령 충만한 사건 이후 기독교가 창립되면서 이러한 영감의 직접적인 산물로 새로운 찬송이 태어나게 되고, 새로운 기독교 특유의 교회음악들이 속속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때에 생긴 초기 기독교의 노래들로, ‘대영광송’(Gloria in Excelsis), ‘영광송’(Gloria Patri), ‘삼성송’(三聖頌, Ter Sanctus), ‘할렐루야’(Hallelujah), ‘세 히브리 아이들의 노래’(Benedicte), ‘시므온의 노래’(Nunc Dimittis), ‘마리아의 송가’(Magnificat), ‘대감사가’(Te Deum), ‘사가랴의 노래’(Benedictus)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노래들이 가장 오래된 찬송들이라 할 수 있죠.
오늘은 기독교 최초의 찬송의 하나인 ‘영광송’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하늘의 천사들이 내려와 찬송한 기록이 있지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는 바로 이 대목에서 나온 찬송들입니다. ‘천사의 찬송’(Angelic Hymn)이라고 하는 이 노래는 이 ‘천사의 노래’에 뒤에 삼위일체에 관한 아리우스 논쟁(Arian Controversy) 후 추가한 “태초에도 그러했음 같이 이제와 영원히 끝없는 세계에 아멘”이 붙은 찬송은 그냥 ‘영광송’이라 하고, 현재 가톨릭의 미사통상문에서 사용하는 찬송을 ‘대영광송’이라 합니다. 또 ‘대영광송’을 ‘대송영’(Great Doxology)라고도 하고, 짧은 ‘영광송’을 ‘소송영’(Lesser Doxology)라고도 하지요.
2C경에 나온 “하늘 높은 곳에 하나님께 영광, 땅에는 마음 착한 이에게 평화. 주께 찬양 드립니다. 찬미하나이다. 경배합니다. 영광 드립니다. 주님의 영광을 인하여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 하나님, 하늘의 왕, 성부의 어린 양,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여, 세상 죄를 지시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 오른 편에 앉아 계시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만 홀로 거룩하시다. 주님만 홀로 구세주, 주님만 홀로 높으시도다. 예수 그리스도. 성삼위 일체께 영광 영원토록 영광. 아멘”이라는 ‘대영광송’의 가사는 누가 지었는지 모릅니다.
GLORIA PATRI라는 곡명이 2장이나 4장이 꼭 같은데 헷갈리죠? 그런데 2장과 4장의 작곡자는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GLORIA PATRI 옆에 IRREG.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불규칙적(irregular)라는 말이죠. 곡명은 같은데 멜로디가 다르니 말입니다. 2장은 1844년 작이고, 4장은 7년 후인 1851년 작인데 작곡자 마인케(Charles Christopher Meinke, 1782-1850)는 독일계 미국인으로 오르가니스트인 올덴부르흐(Oldenburgh)공의 아들로 18세 때 미국으로 건너와 볼티모어(Baltimore)의 성 바울 감독교회에서 봉사한 피아니스트이며 오르가니스트이고, 작곡가입니다. ‘대감사가’(Te Deum), ‘시편송영곡’, ‘찬송가집’(Music for the Church)등을 작곡하여 발간했고, 교향곡도 작곡했는데, 한때 유럽을 방문했을 때 베토벤도 그의 작품을 보고 극찬을 했다고 하는군요.
2장과 4장은 구조상 리듬이 닮은꼴이죠? 2444마디의 불규칙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2마디 째 “성부성자 성령께”에서 단락감을 가지게 되는데, 2분 쉼표인 이곳에서 충분히 쉬고 나갈 수 있도록 해야겠지요. 우리가사엔 ‘성부 성자 성령’을 한꺼번에 몰아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원래 영문 가사는 “성부께 영광”(Glory be to the Father)하고 난 다음 “성자께 영광”(and to the Son), 그리고 “성령께 영광”(and to the Holy Ghost) 하며 따로 따로 찬송하게 되어 있지요. 어느 신학자는 이 찬송 번역이 잘 못되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원문에는 “성삼위께”하는 부분이 없거든요. 뿐만 아니라 “성삼위께”는 신학적으로 잘못된 표현이라는 것이죠. ‘성삼위 일체’이지 ‘성삼위’는 아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노래에 음절을 맞추기 위해 ‘일체’가 빠졌는데 그도 그럴 듯합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부를 때 “성삼위 일체께”라는 생각을 가지고 부르면 되지 않겠나 생각해 봅니다.
저 유명한 순교자 폴리캅(Polycap, 69-155)이 화형을 당하면서 불렀다는 ‘영광송’은 정교회 같은 동방교회나 우리 개신교나 가톨릭 등 서방교회에서 모두 공식적인 찬송으로 사용하고 있고, 예배 시작 전이나 마지막에 사용하는 짧은 기도문(Collects)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노래는 시편을 노래한 다음에 후미에 붙여 노래하는 관습이 있었는데요, 예를 들어 모차르트의 ‘구도자를 위한 저녁기도’(Vesperae solennes de confessore, K.339)를 보면 매 곡마다 끝에 ‘영광송’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성가대의 찬양곡이나 일부 찬송가에도 보면 끝 절에 ‘영광송’이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편에 이어 이 송영을 부르는 교회의 전통이어서, 의식을 중시하는 교회 예배에선 시편교독을 전 후해서 부르기도 합니다.
2006. 10. 03
103장, 참 목자 우리 주
이집트 중부지역에는 옥시린쿠스(Oxyrinchus)란 곳이 있는데, 이곳은 교회음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1918년에 이곳에서 파피루스 조각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너무 오래되어 삭아 없어진 파편가운데 그리스식의 표기법으로 그려진 찬송악보가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 음악의 유일한 자료이기에 매우 귀중하게 여기고 있지요.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이것은 3C말경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하는 시인의 작품으로 추정하는데, 이 조각에 쓰여 진 가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이 잠잠할 수 없으며, 찬란한 별들이 빛을 발하지 않을 수 없고, 강들이 파도치지 않을 수 없도다. 성부와 성령을 찬양할 때 온 천지가 조화를 이루는도다. 아멘. 아멘.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그에게만 홀로 권세와 찬양을 돌릴지어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부르던 멜로디가 붙은 헬라찬송인 것이죠. 예수님이 살던 시대는 로마가 지배하던 시대였지만 로마제국의 정신적 지주는 헬라문화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는 로마의 속국임에도 불구하고 헬라의 철학, 예술, 문화가 우수하였기에 로마는 헬라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헬라어 역시 교회의 언어로 3백여 년 간 계속 사용되었지요. 히브리어 구약성경이 당시의 언어인 헬라어로 번역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7십인 역(Septuagint)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찬송 역시 당시 상용어인 헬라어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죠.
우리 찬송가에서 성경구절로 된 찬송 외에 가장 오래된 찬송은 어떤 찬송일까 궁금하시죠? 찬송의 역사는 성경의 역사와 같습니다. 구약성경이 히브리인들의 성경이므로 히브리어로 쓰였잖아요? 구약시대의 찬송이 히브리 찬송이지요.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쓰였기 때문에 찬송 역시 헬라어로 불려 진 것이죠. 이후, 교회의 언어가 라틴어로 바뀌면서 라틴어 찬송이 불려지고, 종교개혁 이후 자국어(自國語)로 부르게 되죠. 그래서 헬라어로 쓰인 이 ‘참 목자 우리 주’ 가 가장 오랜 찬송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작사자란에 보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c.150-c.220)라고 쓰여 있지요? 알렉산드리아는 BC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도시인데, 그 때부터 방대한 대도서관이 있고, 플라톤학파, 신플라톤학파, 스토아학파, 에피크로스학파 등 세계적인 학자들이 모인 헬라철학의 중심도시입니다. 2C 초 기독교가 들어온 이 후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is) 철학의 중심지가 되지요. 헬라신학의 아버지’로 일컫는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신학교(Catechetical School, c.190-203)의 교장으로서 그리스의 여러 부문의 학문과 철학, 구약과 신약, 외경, 위경, 영지주의, 이단적인 문서에 있어서도 통달한 매우 박식한 학자였습니다.
그는 원래 신비주의자였는데, 크리스챤이 된 이후 기독교 진리와 교훈을 헬라철학과 영지주의 적인 관점에서 설명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철학의 목적은 선한 것이지만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철학은 쓸 데 없는 것이고, 철학이 어떤 목적에 도달하려면 그리스도를 통해야만 가능하며,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는 만족할만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볼 때 그의 찬송 시는 헬라 시의 진수와 기독교 신학을 결합시켜보려는 시도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 찬송은 서행만 제하곤 모두 헬라시의 운율인 약약강조(anapaest)로 되어 있습니다. 이 찬송은 이교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새 신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그의 저서 ‘스승’(Paedagogus)의 마지막 부분에 로고스(Logos, 요1;1)이신 ‘스승’에게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시를 첨부하였습니다.
이 찬송가는 1846년 미국의 회중교회 덱스터(Henry M. Dexter)목사에 의하여 영어로 번역되었는데요, 신명기 32장 7절 말씀인 “옛날을 기억하라”는 본문 말씀으로 ‘초대교인 들의 뚜렷한 특징 몇 가지’란 제목으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설교 후에 부를 옛 찬송을 찾다가 이 시를 발견하고 영어찬송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곡 KIRBY BEDON은 “베돈 근처 교회‘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요, 버네트(Edward Bunnet, 1834-1923)가 1887년에 작곡해서 같은 해에 회중교회 찬송가(The Congregational Church Hymnal)에 수록하였습니다. 이 찬송의 멜로디를 보면 모두 14마디로 되어있는 불규칙적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12마디나 16마디이면 노래하기가 편 할 텐데 말입니다. 가사의 형태로 보면, “참 목자 우리 주 사랑과 진리로 이끄시니”(4+2)가 한 문장이므로 ‘참 목자 우리 주’에서 끊고, ‘사랑과 진리로 이끄시니’는 연결해서 불러야겠습니다.
클레멘트의 ‘스승’에서는 예수를 믿는 크리스챤이 되면 참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면서 실제 생활도 바꾸어야 하는 데, 먹는 것, 마시는 것, 잠자는 것, 옷 입는 것, 말 하는 것, 소유하는 것, 생각하는 것, 오락 등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가르쳤다고 하는데요, 비록 여러 차례 번역의 과정을 거친 탓에 원 뜻의 아름다움은 느낄 수 없으나 이 옛 찬송에서 초대 크리스챤들의 신앙과 불굴의 용기를 엿 볼 수 있어 더욱 가치가 있고, 은혜가 됩니다.
2006. 10. 10
예루살렘 금성아
골동품을 좋아하는 분들은 깨진 화병이나 낡은 그림이라도 귀히 여기고 잘 보관하고 자랑스러워합니다. 우리 찬송가도 고미술품같이 귀한 것들이 많은데, 귀한 줄 모르고 버려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 찬송가에서 하나 밖에 없는 헬라찬송인 ‘참 목자 우리 주’(103장)를 소개했는데요, 성전 등과 초를 켤 때 부르는 3C 헬라 찬송인 작자미상인 ‘즐거운 빛이여’(성 102장), 시리아 찬송작가인 에프레임(Ephraim, d.373)의 찬송 ‘주여 성사를 만진 손’(성 165장)과 ‘겸손한 요셉’(성 449장) 등이 성공회 찬송가인 ‘성가’에는 수록되어 있습니다.
A.D.330년에 콘스탄틴 대제(Emperor Constantine)가 로마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옮기고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이름을 바꾸면서 로마제국이 동방과 서방지방으로 갈라지게 되고, 교회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눠지게 되었지요. 이 때 동방교회, 즉 비잔틴교회에서 불린 찬송을 비잔틴 찬송이라 합니다. 비잔틴교회의 언어가 헬라어니까 찬송 역시 헬라어이지요. 서방교회는 시편과 성경에 근거한 가사만 채택한 반면에 비잔틴찬송은 헬라 시로 창작된 가사가 많았습니다. 이 귀한 찬송들이 개편찬송가와 새찬송가, 합동찬송가에 이미 수록되었었는데 ‘믿는 자여 보라’(개 347장), ‘부활하신 날’(개 138장, 새 178장, 합 136장), ‘주 예수의 부활’(개 140장, 새 172장) 등이 비잔틴찬송입니다. 동방교회는 음악을 상당히 중시하고 있는데, 오늘의 정교회(正敎會)에서는 이러한 옛 헬라찬송이 많이 불리고 있습니다. 서방교회에 헬라찬송을 영어로 번역하여 소개한 분은 저 유명한 영국의 닐(John Mason Neale, 1818-1866)목사님인데요, 그는 옛 찬송의 가치를 알고 발굴하는데 애썼습니다. 아쉽게도 이 보물들이 우리 찬송가에서는 다 빠져있습니다.
4C에 들어서면서 헬라문화는 쇠퇴해지고, 언어도 헬라어 대신 라틴어로 대치되면서 헬라어 성경 역시 라틴어 성경(Vulgate)으로 번역되고, 찬송도 라틴어찬송이 불리게 된 것이죠. 라틴어 찬송가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보아티에의 힐러리(Hilary of Poitiers, c.310-366), ‘ 라틴찬송의 아버지’로 불리는 암브로시우스(Ambrosius of Milan, c.340-397) 등 여러 분이 있는데, 우리 찬송가에는 자료가 없고, ‘새 아침이 밝아오니’(새 47장, 합 34장)를 지은 프루덴티우스(Aurelius Clemens Prudentius, 348-413), ‘기쁜 이 날 아침’(개 137장, 새 179장, 합 135장)과 ‘구주께서 십자가에’(성 126장)를 지은 훠투나투스(Venantius Fortunatus, c.535-609), ‘왕 되신 우리 주’(130장)를 지은 테오둘프(Theodulph, c.762-821), ‘임 하소서 성령이여’(성 150장)를 지은 마우루스(Rabanus Maurus, c.775-856), ‘주님의 영광이 빛나는 이 날’(새 71장)을 지은 아벨라르드(Peter Abelard, c.1079-1142), ‘구주를 생각만 해도’(85장), ‘오 거룩하신 주님’(145장), ‘인애한 우리 주’(개 518장, 새 540장, 합 352장)를 지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드(Bernard of Clairvaux, 1091-1153), 이 찬송을 지은 클루니의 베르나르드(Bernard of Cluny), 그리고 ‘온 천하 만물 우러러’(33장)를 지은 성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 1182- 1226), ‘할렐루야 주 다시 사셨다’(개 135장)를 지은 티쎄랑(Jean Tisserand, d.1494), ‘참 반가운 신도여’(122장)를 지은 웨이드(Johb F.Wade, 1711-1786) 등이 대표적인 라틴 찬송의 작가입니다.
베르나르드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드와 구별하기 위하여 클루니의 베르나르드라고 부르는데요, 1122년에 수사가 되어 1145년에 악한 세상의 타락과 부패에 대하여 쓴 ‘세상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De contemptu mundi)는 2966행의 장시를 썼습니다. 이 장시를 앞서 소개한 닐 목사님이 218행을 발췌하여 번역해서 1858년에 ‘천국에 관한 클루니의 수도사 베르나르드의 운율시’라는 시집을 냈는데요, 여기에서 여덟 편의 찬송시가 생겨났고,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찬송이 된 것입니다. 원래의 장시는 세상의 부정적인 면을 풍자적으로 썼지만 이 찬송의 부분에서는 하늘나라의 평안과 영광을 매우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곡명인 EWING은 이 곡을 작곡한 에윙(Alexander Ewing, 1830-1895)의 이름인데요, 애버딘 태생인 에윙은 독일에서 음악뿐만 아니라 언어학도 전공했고, 거의 4십년동안 군인 장교로 보냈는데 군 복무 기간 동안 군악대를 조직하고 많은 군가를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59세에 중령으로 예편 후에는 많은 찬송 곡을 작곡 하였는데요, 이 찬송은 1853년에 작곡하여 1857년 출판된 ‘시편과 찬송’에 처음 발표하였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성’ 예루살렘! 상상해 보십시오. 황금빛 성전 돔을 중심으로 도시 가득한 베이지색 석조건물, 여기에 아침햇빛이라도 비칠 때면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온통 ‘황금의 도시’이죠. 시인은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영원한 도성(계21;18)을 그리며 “예루살렘 금성아!” 노래합니다.
Jerusalem the Golden, With and honey blest.
2006. 10. 17
주 달려 죽은 십자가
그레고리 성가(Gregorian Chant)란 말 들어보셨지요? 이 찬송의 작곡자를 표시한 윗편 오른쪽에 그레고리안 선율이라고 쓰여 있지 않습니까?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7C경부터 정리되어 불리는 단선율(monophonic)성가를 말합니다. 그레고리우스(Gregorius I, c.540-604)는 590년부터 604년까지 14년간 재위한 교황인데요, 그는 예부터 내려오는 많은 예배 의식과 찬송들을 수집하고 잘 정비해서 조직화하였는데, 바로 이 음악을 그의 이름을 따 그레고리 성가라고 부르고 있지요. 서양음악의 역사를 말하자면 두 개의 거대한 뿌리로 이야기합니다. 그 하나는 히브리 음악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 음악이지요. 기독교음악이 유대교 전통을 바탕으로 해서 그리스의 음악이론을 딛고 이를 발전시켜 지금의 훌륭한 교회음악을 이루게 된 것 아니겠어요? 그가 수집하고 정리한 찬송 자료들은 구약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모든 히브리 찬송들과 헬라찬송, 라틴 찬송 그 모두를 총망라한 것이죠. 그래서 그레고리 성가는 라틴어로 된 낭송풍의 음악으로서 무반주 단선율 음악으로 정의합니다. 가톨릭이나 성공회에서는 아직도 많이 불리고 있어 ‘임 하소서 성신이여’(성 150장), ‘분노의 날’(성 2A장), ‘유월절의 어린 양’(성 453장), ‘슬픔의 성모’(성131장)등이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멜로디로서 솔렘수도원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그 창법을 계승, 보존하고 있고요, 옛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찬티클리어 같은 여러 전문 연주자들에 의해 연주되어 음악애호가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영국찬송가의 개척자’, ‘영국찬송가가의 아버지’로 불리는 왓츠(Isaac Watts,1674-1748)가 1707년에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 6;14)란 말씀을 배경으로 쓴 이 찬송 시의 원 제목은 ‘세상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입니다. 이 찬송 시는 1707년에 발간된 ‘찬송가 성가집’에 발표되었습니다. 왓츠는 시편 전체를 신약의 관점에서 의역하고 재해석해서 시편가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가 가진 찬송 가사의 철학은 어느 것이나 신약의 복음의 빛으로 다시 해석되어야 하고, 시대 상황에 맞도록 적용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본인의 개인적인 신앙에 기초하여 쓴 작품도 많이 있는데, 이 찬송은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왓츠 자신의 신앙적인 응답을 잘 나타내주고 있어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왓츠의 찬송은 우리 찬송가에 많이 실려 있죠. ‘구주와 왕이신 우리의 하나님’(7장), ‘목소리 높여서’(8장), ‘큰 영광중에 계신 주’(41장), ‘햇빛을 받는 곳마다’(52장), ‘이 날은 주의 정하신’(58장), ‘기쁘다 구주 오셨네’(115장), ‘만왕의 왕 내 주께서’(138장), ‘웬 말인가 날 위하여’(141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147장), ‘저 하늘나라는’(227장), ‘저 높고 넓은 하늘이’(237장), ‘주 사랑하는 자 다 찬송 할 때에’(249장), ‘나는 예수 따라가는’(387장), ‘십자가 군병들아’(390장), ‘십자가 군병 되어서’(391장), ‘천성을 향해 가는 신도들아’(401장), ‘예부터 도움 되시고’(438장)등...
미국 최초의 음악박사이면서 ‘미국 찬송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메이슨(Lowell Mason, (1792-1872)이 편곡한 이 찬송의 곡명은 HAMBURG입니다. 찬송가에 밝혀 있듯 1824년 곡을 만들고, 이듬해인 1825년에 보스턴에서 출판된 ‘헨델과 하이든 협회 교회성가집’에 발표하였습니다. 메이슨의 찬송도 우리 찬송가에 많이 실려 있죠. 그가 작곡한 찬송으로 ‘찬송하는 소리 있어’(44장), ‘지난 이레 동안에’(56장), ‘우리 구주 나신 날’(121장), ‘날 구원하신 예수를’(196장), ‘저 높고 넓은 하늘이’(237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248장), ‘저 북방 얼음산과’(273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364장), ‘어둔 밤 쉬 되리니’(370장), ‘못 박혀 죽으신’(435장), ‘맘 가난한 사람’(516장) 등 11편, 그리고 편곡한 찬송으로 ‘만 입이 내게 있으면’(23장), ‘영광의 왕께’(31장), ‘즐겁게 예배할 날’(57장), ‘지난밤에 보호하사’(66장), ‘기쁘다 구주 오셨네’(115장), ‘한 밤에 양을 치는 자’(124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147장), ‘구주여 크신 인애를’(170장), ‘샘물과 같은 보혈’(190장), ‘생전에 우리가’(280장), ‘내 평생소원 이것 뿐’(376장), ‘주 믿는 형제들’(525장) 등 12편입니다.
이 찬송에서 특이한 것은 멜로디가 처음부터 끝까지 2도씩 움직이는 순차진행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도레미레미파미레미...” 그리고 이 멜로디에 사용된 음은 ‘도레미파’와 ‘시’, 모두 다섯 음 밖에 되지 않고요. 리듬도 사분음표와 이분음표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이 간단한 노래가 많은 고난절, 부활절 용 칸타타에 사용되고, 많은 이들에게 애창되고 있지 않습니까?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란 고백은 온 천하 보다 귀한 나의 ‘몸’으로 제물 삼겠다고 다짐하며 이어집니다.
2006. 10. 23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은 세계교회가 지키는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독일의 비텐베르그(Wittenberg)의 성교회 건물 정문에 ‘95개조 논제’를 못 박은 날이 바로 1517년 10월 31일이거든요.
루터는 독일의 아이스레벤(Eislewen)에서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만스펠트의 라틴초급학교를 나와 형제단학교(Frate harren), 아이제나하의 라틴학교를 거쳐 유럽 최고의 학부인 엘보트 대학 문학부에서 공부한 후 엘보트의 어거스틴파의 수도원에 들어가 24세에 신부가 되었고, 1510년 비텐베르그 대학 신학부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대학에서 로마서 강의를 하였는데, 당시는 로마 교황인 레오 10세가 베드로 성당 건립 모금을 위해 속죄권(贖罪券, Indulgence taxes)을 판매하는 등 교회부패에 절정에 이르던 때였지요.
루터는 성경말씀에 정면 배치되는 가톨릭교회의 정책을 보다 못해 드디어 정치적, 신학적 공격을 최고 권력자인 교황에게 정면으로 퍼붓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가톨릭에선 우리 개신교도를 ‘항의자’란 뜻으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하지 않습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은 루터의 개혁사상을 잘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루터는 ‘만인사제직’의 신학으로 교인은 누구나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어야 하고,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당시 성경은 성직자와 특권층만이 볼 수 있었고, 어려운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들은 성직자들이 읽어주는 것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찬송 역시 성직자와 성가대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일반 회중들은 청중에 불과 했지요. 루터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으로 말씀하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찬송으로 응답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루터는 신구약 성경을 13년이나 걸려 독일어로 번역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라틴어로 예배드리는 ‘라틴어미사’는 지식층의 사람들을 위해선 그대로 존속시킨 채, 서민층과 농민들을 위해서 그들의 특수성에 맞도록 ‘독일어 미사’(Deutsche Messe)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 독일어 미사에서 성가대와 회중이 음악을 적절히 나누어 부르게 하였습니다.
루터는 문학과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직접 회중들이 노래하도록 직접 자국어(自國語)인 독일어 회중찬송들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코랄’(Chorale)입니다. 그는 37편의 코랄을 만들었는데, 그 중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를 비롯한 9편은 창작한 찬송이고, 나머지는 예부터 불려 내려오는 라틴어자료를 번역하거나, 개혁 이전의 찬송을 수정하거나 시편 등 성경의 여러 부분을 인용하여 만든 것들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서 종교개혁의 성공을 두고 하나님의 섭리에 다시금 감동합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때가 차매’(갈 4;4)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고 했는데요, 예수님께서 오시기에 앞서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통치와 더불어 헬레니즘 문화와 언어의 통일, 로마가 뚫어놓은 길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될 수 있도록 준비된 바로 그 ‘때’라면, 루터의 종교개혁도 ‘때가 차매’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아무리 성경이 잘 번역되고 찬송이 작곡되어도 인쇄되어 반포되지 않으면 어느 세월에 그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마침 그 때 당시 인쇄술이 발명되었기에 성경을 찍어내는 대로 회중들이 볼 수 있었고, 찬송을 찍어 내는 대로 회중들이 부를 수 있지 않았을까요?
‘복음찬송의 아버지’라 불리는 루터는 심오한 성경의 교훈을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게, 그리고 힘 있게 찬송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소 거칠고 투박한 평민들의 언어라 할지라도 구원의 진리를 침투력 있게 신앙고백 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죠. 그래서 찬송학자인 쥴리안은 “루터의 찬송은 그의 신학과 경건의 맥박이었던 의롭다함을 받은 신앙이 대담하고 자신 있고 기쁜 정신으로 생동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루터가 45세 되던 1529년 여름, 범즈(Worms)의 재판정에 나가기 전날 밤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주시고 승리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시편 46편 내용을 기초해 이 찬송가를 지어 그의 동료들과 함께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이 땅의 마귀가 저 범스 재판정 지붕 위의 기왓장처럼 들끓더라도 진리로 이길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카알라일은 이 찬송가를 “알프스 산의 눈사태 소리와 같고, 지진이 터져 나오는 소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코랄은 루터 교 예배에서 ‘교회칸타타’(Church Cantata)로 발전하여 이 후 바하(J.S.Bach)에 이르러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기게 되는데요, 바하는 ‘종교개혁의 전투가’인 이 힘찬 코랄을 주제로 하여 종교 개혁 일을 위한 ‘칸타타 80번’을 작곡했습니다.
2006. 10. 30
오 거룩하신 주님
역사를 살펴보면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바꿔놓은 사건이 참 많이 있습니다. 4C의 ‘라틴 찬송의 아버지’라 불리는 암브로시우스(Ambrosius of Milan, c.340-397)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우스 이단과 대항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담은 찬송으로 바른 신앙을 가지게 한 일이라든지, 교황 그레고리우스(Gregorius I, c.540-604)가 교회 예배의식을 재정비한 일이라든지,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찬송을 통해 ‘만인사제직’ 사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개혁을 성공시킨 일이라든지 그 예는 수 없이 많이 들 수 있습니다.
지금은 많은 코랄(Chorale)을 비롯한 찬송 자료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마는 종교개혁 당시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해 내야했던 개혁자들은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고안해 낸 예배찬송인 코랄을 만들어 내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을 썼습니다. 그 첫째는 새로이 작사 작곡하여 새로운 코랄을 만드는 일이었고, 그 둘째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선율을 회중들이 부르기 좋게 개조하는 일이었지요. 왜냐하면 당시 교회의 노래들은 전문적인 성가대만이 부를 수 있는 매우 긴 선율(melody line)을 가진 찬트(Chant)였거든요. 그래서 이를 회중들이 짧은 숨으로도 부를 수 있도록 멜로디를 자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코랄에는 눈 모양의 페르마타(fermata)가 많이 붙어 있습니다. 페르마타란 ‘정지’의 뜻을 가졌기에 그 곳에서 노래를 정지하고 숨을 쉬라는 것입니다.
찬송가에서 페르마타가 많은 곡은 십중팔구 코랄로 보면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방법이 찬송 시에 교회 밖의 노래, 즉 세속 노래 선율을 사용하여 코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콘트라팍툼(Contrafactum)이라 했는데, 이런 식으로 만든 코랄이 16C에 174편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런 저런 방법으로 수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코랄이 우리찬송가에 여러 편 실려 있는데, 대략 이렇습니다.
개혁 초기의 코랄로는 ‘오 거룩하신 주님’(145장), ‘왕 되신 우리 주께’(130장), ‘이새의 뿌리에서’(106장), ‘주 예수 우리 죄 인해’(개 128장), ‘깨어라 먼동 튼다’(개 77장)등 이며, 17C의 코랄로는 ‘다 감사드리세’(20장), ‘내 영혼아 곧 깨어’(18장), ‘주는 귀한 보배’(452장)입니다. 그리고 17C 말 경건주의 시대에 나온 코랄로 ‘다 찬양 하여라’(21장), ‘하나님이 친히’(54장), ‘다 함께 주를 경배하세’(2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개 432장)등과, 18C 코랄로 ‘내 주여 뜻대로’(431장), ‘아름다운 시온 성아’(250장) 등인데, ‘깨어라 먼동이 튼다’, ‘주 예수 우리 죄 인해’,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같은 코랄은 악성(樂聖)들도 오라토리오나 칸타타 등에 즐겨 사용한 코랄 명곡인데 우리 찬송가에 빠져있어 매우 아쉽습니다.
이 찬송은 앞서 설명했듯이 콘트라팍툼의 방법으로 만들어진 코랄이지요. PASSION CHORALE인 이 곡조는 16C 유명한 작곡가인 핫슬러(Hans Leo Hassler, 1564-1612)의 연가인 ‘내 마음은 (그 소녀 때문에)괴로워한다’(Mein G’mut ist verwirret)에서 나온 선율인데, 클레아보의 베르나르드(Bernard of Clairvaux, 1091-1153)의 찬송 시에 맞춘 것입니다. 명상의 생활을 대단히 중시한 신비주의자 베르나르드가 라틴어로 쓴 장시 ‘Rhythmica Oratio’중의 한 부분을 게르하르트(Paul Gerhardt, 1606-1676)가 독일어로 번역하여 8행 10절로 1656년 크뤼겔의 ‘Praxis Pietatis Melica’에 발표했습니다. 이 독일어 번역 시는 라틴어 원문보다 더 열열하고 성서적이라는 평을 얻고 있습니다. 베르나르드의 원래의 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당하는 몸통 전체를 다리, 무릎, 손, 옆구리, 가슴, 심장, 얼굴 등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 표현했는데, 게르하르트는 얼굴 부분만을 떼어 이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게르하르트는 ‘내 영혼아 곧 깨어’(18장)을 지은 루터 교 목사님이지요.
작곡자 핫슬러는 독일의 누렘베르그(Nurenberg) 태생으로 르네쌍스 말기에서 바로크 초기에 걸쳐 활약하였던 당시 뛰어난 작곡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독일적인 깊은 정서와 이탈리아적인 우아함과 활발함, 이탈리아 풍의 음색 효과에의 풍부함을 융합시켜 많은 훌륭한 종교곡과 다성(多聲)작품을 남겼는데요, 그의 작품으로는 많은 미사와 모테트 외에 ‘새 독일 가곡집’ 등이 있고, 이 찬송은 1601년 5성부 곡으로 작곡한 ‘새 독일 가곡의 기쁨의 마당’(Lustgarten Neuer Teutscher Gesang)에 발표된 곡입니다. 사랑의 노래로 작곡된 이 세속적인 멜로디가 개혁자의 손에 의해 거듭나, 예수님의 고난당하는 얼굴을 노래한 성스런 노래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핫슬러는 시편 96편을 노래한 ‘오 찬송 드리세’(O Sing unto the Lord)의 작곡자로 우리에게 낯익지요.
이 찬송의 곡명이 PASSION CHORALE로 붙여진 것은 바하(J.S.Bach)가 수난 오라토리오인 ‘마태수난곡’에서 이 코랄곡조를 사용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Weihnachts-Oratorium)등 그가 쓴 여러 교회작품에도 종종 나옵니다.
2006. 11. 06
산마다 불이 탄다 고운 단풍에
아마도 30년쯤 전으로 기억합니다. 시인인 저의 친구와 함께 광나루를 건너 천호동 농가에 자리 잡은 작가 임옥인(林玉仁, 1915-1995)교수님의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천호동이 번화가가 되어 있지만 당시는 천연 약수가 솟고 논과 밭이 펼쳐진 한가한 농촌이었지요. 그곳은 임 교수님이 작품을 쓰기 위한 초가집으로 된 작업실과 넓은 마당과 밭이 있는 매우 인상적인 전원 농가 주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찾았을 땐 교수님은 몸이 편찮으셔서 누워 계셨습니다. 얼마 전 유럽 여행 중에 갑자기 손이 오그라들고 몸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임 교수님은 그 곳에서 어린아이 같이 마비된 자신의 손을 움켜잡고 하나님께 떼를 쓰며 울면서 기도했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임 교수님의 기도에 즉시 응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임 교수님은 연노하고 불편하신 가운데서도 초면인 젊은 저에게 이 같은 간증을 하시며 그 때에 지은 시를 읊어 주셨습니다. “나의기도는 아기기도/ 나의 노래는 아기노래/ 말도 서투르고 어리광부리는/ 나의 기도는 아기기도/ 나의 노래는 아기노래” 감격에 찬 저는 그 즉시 이 소박한 시를 받아 적어 ‘어머니와 함께 부르는 동요’라는 제목으로 작곡하여 그 해 ‘기독교 교육’지에 발표했습니다.
소설가이며 교육자인 임 옥인 교수님은 함경북도 길주(吉州) 태생으로 함흥(咸興)의 영생여자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奈良)여자고등사범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 교사로 있으면서 농촌계몽운동도 하셨습니다. 해방 후에는 월남하여 창덕여고 교사, 건국대학교 교수, 학장 등을 역임하며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하였지요. ‘부인신보’ 편집차장(1948),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1949), 월간 ‘부인경향’ 편집장 등 활동을 하며 많은 작품을 썼는데, 단편소설로 ‘봉선화’, ‘고영’(孤影), ‘후처기’(後妻記‘), ’전처기‘(前妻記), 산(産), 젊은 아내들’, ‘낙과’(落果), ‘그리움’, ‘구혼’(求婚), ‘눈 먼 여인’, 성탄수‘(聖誕樹), ’피에로‘, ’아화상‘(阿畵像) 등과 ‘그리운 지대’, ‘기다리는 사람들’, ‘월남 이후’, ‘통곡 속에서’, ‘일상의 모험 ’, ‘젊은 설계도’ 등의 장편소설이 있습니다.
섬세한 여성적인 감성과 의지라는 단선(單線)을 통해 꾸준히 작품세계의 풍요와 성숙을 실천해 온 이분의 작품들은 거의 여성적인 센티멘털리즘으로 차 있고, 이는 극히 소박한 휴머니즘을 꾸준히 긍정하는 작업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분의 작품을 대해보면 여성특유의 연정(戀情)과 부정(婦情)과 모정(母情)의 협화적인 것을 함유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서울 왕십리교회 권사님인 임 옥인 교수님은 평생 대수술을 열한 번이나 받을 정도로 병약하였습니다. 오죽했으면 자신의 몸이 걸레와도 같다고 했을라고요. 그러나 평생 병고와 씨름하면서도 찬송과 기도로 극복하면서 자신은 주님의 은혜로 덤으로 산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분의 간증 중에 늘 입버릇처럼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예수님은 폐품 이용에도 능하신 분입니다. 이토록 쓸데없는 육신을 이리 꿰매고 저리 꿰매고 계속 사용하시니...”이 같이 깊은 신앙심에서 나온 감사의 찬송이 이 찬송입니다.
1967년 ‘개편찬송가’를 발간하면서 대폭 우리나라 시인과 음악가의 작품을 많이 수록하기 위해 개편위원회의 위촉을 받아 만들어진 이 감사 시는 마치 아이맥스 영화를 보는 듯 우리 눈앞에 총천연색의 경치가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비록 종이에 쓰여 진 글씨이지만 보이기도 하고, 들리기도 하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저는 엊그제 강원도를 다녀왔는데 오색으로 물든 가을 산을 보며 얼마나 감탄했는지... 여름에 그토록 무성하던 녹색 산들이 어쩌면 샛노랗게, 새빨갛게, 새하얗게, 황금빛으로 알록달록 물들 수가 있어요? 시인은 이런 장면을 보고 드라마틱하게 산마다 불이 탄다고 읊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산마다 골짜기마다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보며 풍년을 노래하며 덩실덩실 흥겨워 춤추는 농부들의 풍년가를 듣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광경입니까?
이럴 땐 우리 민속음악이 제격이죠. 그래서 박재훈(朴在勳, 1922- )목사님은 국악장단에 맞추어 ‘도레미솔라’의 5음 음계를 쓰고 있습니다. 박재훈 목사님의 찬송은 우리 찬송가에 이 찬송과 함께 ‘눈을 들어 하늘 보라’(256장), ‘어서 돌아오오’( 317장), ‘지금까지 지내 온 것’(460장) 등 4장이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신앙인의 스케일이 얼마나 큰지를. 눈이 닿는 공간이라면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고, 손이 닿는 구석구석, 생각지도 못했던 그 작은 일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관심이 있었음에 새삼 감탄하며 춤을 추며 부르는 노래 아니겠어요? 한 해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도움 받은 감사의 제목들을 하나하나 생각해보며 그 대목마다 추임새를 넣어 불러보면 어떨까요? “얼~쑤”, “좋~다”라고요.
2006. 11. 27
만복의 근원 하나님
제가 스위스에 있는 제네바에 들렸을 때입니다. 제네바는 칼빈주의 종교개혁의 중심지이기 아닙니까?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와 더불어 루터가 시작한 유럽 종교개혁의 제2세대를 이끌어 ‘개혁전통’(The Reformed Tradition)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개척자이지요. 그래서 저는 칼빈이 가톨릭 성당을 개혁교회로 접수했다는 돔(Dom)성당을 찾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앞의 제대(祭臺)는 도둑맞은 것 같이 휑하니 비어 있었고, 강대상이 있을 앞자리엔 단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한 테이블에 성경책 한 권만 놓여 있지 않겠어요? 천정을 향해 높이 뻗은 돌기둥에는 성자들의 조각품들을 거칠게 부셔내고 긁어낸 자국들이 당시 모습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고, 지하실 바닥에는 성당에서 그 부셔낸 성상(聖像)들이 널려 전시되고 있었지요. 목 부러진 베드로, 허리 잘린 바울 등 먼지 쌓인 그 조각품들을 보면서 아직도 개혁이 끝나지 않은 듯싶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종교개혁을 이끌던 칼빈은 로마가톨릭의 박해로 인해 중립국인 스위스로 망명하게 되면서 제네바를 중심으로 활발한 개혁운동을 폈습니다. 루터가 가톨릭교회의 전통을 보존해 가면서 개혁신학에 맞게 수정을 한 데 비해, 칼빈과 쯔빙글리는 개혁과 이상을 원시교회에서 그 모델을 찾았기 때문에 가톨릭의 전통과 유산을 거의 타파하지요. 그래서 성당에 설치된 성물(聖物)들이나 고귀한 조각품들은 우상숭배라는 명목으로 모두 부숴 없애버리고, 오르간마저도 부수는 등 교회음악 역시 사그리 없애버렸습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루터는 성경에서 하지 말라는 것만 개혁했고, 칼빈은 하라는 것 외에는 다 없애 버렸다고요. 어쨌거나 칼빈이 이끄는 개혁교회는 얼마동안 찬송 없는 삭막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고안해 낸 것이 시편가(詩篇歌, Psalter)인데요, 칼빈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모든 창작된 찬송은 이단교설(異端敎說)이 끼어들기 쉽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성경에 있는 노래, 즉 시편이나 송가(頌歌, canticle)만을 불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라 할지라도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 불렸던 아름다운 다성음악(多聲音樂)이나 악기 사용도 못하게 하고, 시편가를 유니슨(unison)으로만 부르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원래 칼빈이 고안해낸 운율 시편가가 당시의 세속유행가인 트루베레(Trouvere)나 트루바돌(Troubadour) 같은 음유 시(吟遊 詩)의 리듬을 닮고 있다는 것인데요, 이 또한 루터의 코랄의 생성과정과 비슷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 왕인 프란시스 1세(Francis I)의 궁정시인인 마로(Clement Marot, 1497-1544)가 왕실에 있으면서 여러 시편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운율 시로 만들어 부르곤 했는데 이를 입수한 칼빈이 자신의 시편과 함께 ‘스트라스부르크 시편가’(Srasbourg Psalter, 1539)를 출판하였지요. 때마침 마로 역시 가톨릭 지도자들의 반대로 인해 제네바로 망명하여 칼빈과 동반자가 되고, 그와 함께 시편가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개혁교회의 새 노래인 시편가는 영국에도 알려져 영국의 통속적인 노래 운율인 8686의 발라드(Ballad) 운율로 된 영어 운율 시편가도 생겨났는데, 영국에서도 메리 여왕(Mary Tudor)의 핍박을 피해 제네바로 간 영국 개신교도들이 낙스(John Knox)목사와 함께 교회를 세우고 이곳에서 시편가를 부른 것이지요. 또 낙스 목사는 다시 스코틀랜드에 돌아가 그 곳에서 ‘스코틀랜드 시편가’(Scottish Psalter, 1561)도 만들게 되었는데, ‘주 나의 목자 되시니’(437장)는 이 때 만들어진 8686의 시편가입니다.
이 찬송은 당시 유명한 프랑스 작곡가인 브르즈와(Bourgeois, c.1510-c.1561)의 곡에 붙였던 제네바 시편가(Genevan Psalter, 1551)에서 유래된 것인데, 원래 이 노래 가사는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 지어다”(All people that on earth do dwell)로 되어있는 흠정역(欽定譯, King James Version) 시편 100편이라는 뜻의 곡명 OLD HUNDREDTH 라고 되어있는데, 우리 찬송의 가사는 시편 100편을 노래한 영국운율 시편가가 아니고, 켄(Thomas Ken, 1637-1711)목사의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성공회 찬송엔 ‘온 천하의 만국 백성’(성 219장)으로 원문 번역 찬송이 수록되어 있죠.
켄 목사는 영국 허트포드셔(Hertfordshire)의 버크함스테드(Berkhampstead) 태생으로 윈체스터(Winchester)학교, 허트포드(Hurtford)대학, 옥스퍼드(Oxford)에서 공부하고 바트(Bath)와 웰스(Wells)의 감독이 된 분입니다. 제임스 2세(James II)가 개신교 의 자유를 선포했을 때 서명을 거부하여 ‘런던탑’에 투옥된 일곱 감독 중에 한 분이지요.
이 찬송은 헌금을 봉헌할 때 회중들이 부르는 송영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2006. 12. 04
주 나의 목자 되시니
영국의 그레이트 브리튼 섬의 북서부에 위치한 스코틀랜드는 종교개혁가 낙스(John Knox, 1513 or 1505-1572)를 배출한 나라로 유명하지요. 오늘날 우리나라 장로교의 뿌리를 두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구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어느 지역보다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결실을 맺었으며 복음의 바른 이해와 개혁의 참 정신을 뚜렷이 나타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낙스가 이끄는 종교개혁은 1560년에 드디어 스코틀랜드 의회에 의해 스코틀랜드 교회(Church of Scotland)의 창설을 인준하게 되는데요, 16C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개신교도들은 루터보다는 칼빈의 개혁사상을 따랐기 때문에 교회음악에 있어서도 칼빈의 이상을 따르게 마련이었죠. 그래서 처음에는 자국어(自國語)인 영어 운율 시편가만 허용하였고, 찬송(hymn)은 금하였습니다.
그러다가 !7C 말에 이르러 찬송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는 운율시편가에서 시편만을 문자 그대로 순수하게 번역하다 보니 문학적으로 질이 떨어지고 노래 부르기 어색하였기 때문에 보다 문학적인 수준을 높여야 할 필요를 느꼈고, 아울러 찬송의 내용을 시대적 환경에 관련 시켜보려는 의도와 함께 그 내용을 시편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로 확대하면서 더욱 복음적인 내용도 요구되었던 것이죠. 이런 저런 이유로 시편가가 점점 시들해지면서 이에 대치할 찬송들이 속속 나타나게 되는데, 루터가 지은 독일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384장) 같은 코랄도 영어로 번역하게 되고, 드디어 창작된 찬송도 등장하게 됩니다.
작사자를 표시하는 왼쪽 위에 보면 ‘스코틀랜드 시편가’(Scottish Psalter) 1650이라고 쓰여 있지요? ‘스코틀랜드 시편가’란 1650년도에 출판된 시편가집 이름인데요, 작사자인 루스(Francis Rous, 1579-1659)가 편집한 시편가(The Psalms of David in Meter)에 이 찬송이 수록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책은 당시 가장 우수한 영어 시편가를 모아 놓았다고 하여 ‘시편가의 왕자’라고까지 불리지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낙스의 지도하에 시편가를 만들어 사용 했는데, ‘스코틀랜드 시편가’는 이 책 이외에도 그 이전에 낙스가 편집한 1559년도 판도 있고, 1561년, 1615년도 판 등이 있습니다. 루스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한 때 웨스트민스터 의원직을 맡기도 했으며, 히브리어 연구와 더불어 앞서 설명했듯이 시편 번역에 많은 공적을 남겼습니다.
이 찬송, 이 시편가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다윗이 지은 시편 23편을 5절로 나누어 1절은 시편 23;1-2, 2절은 23;3, 3절은 23;4, 4절은 23;5, 5절은 23;6을 각각 8686의 운율로 만든 것입니다. 루스가 만든 운율 시편가 원문의 1절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The Lord''s my shepherd, I''ll not want (8) He makes me down to lie (6) In pastures green; He leadeth me (8) The quiet waters by (6) BELMONT라는 곡명의 이 찬송은 사업가이며 음악가인 가디너(William Gardiner, 1770-1853)의 작품입니다. 그는 작곡뿐만 아니라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고전파 작곡가들의 곡들을 편곡하여 찬송가로 만드는 등 ‘성가 곡’을 편찬하기도 하고, 음향학 관계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지요. 이 찬송은 1815년에 그가 편찬한 ‘성가 곡’(Sacred Melodies)에 실린 찬송입니다.
원래 초기 영국이나 스코틀랜드의 시편가의 곡조에 비한다면 매우 발전된 찬송이지요. 초기의 영어 운율 시편가는 매우 단순해서 가사 한 음절에 음표 한 음씩 붙여진 음절식(音節式, Syllabic Style)으로만 만들어졌는데요, 18C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이런 시편가의 단조로움을 깨고 리듬을 변화시키고, 곡조에 장식음을 넣는다든지 풍부한 화성을 붙여 음악적인 변화를 준다든지 해서 발전된 경향을 볼 수 있는데요, 이 찬송이 퍽 시일이 지난 19C 찬송이긴 해도 ‘부족-함’, ‘없-어라’, ‘물-가’, ‘인-도’, ‘하-신다’ 같이 한 음절의 가사에 두 음씩 붙이는 네우마식(Neuma 式)으로 리듬의 변화를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지금 우리가 부르는 찬송에서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만...
ABAC의 2부분형식으로 된 이 멜로디는 마치 하나님의 은혜가 하늘에서부터 낮은 우리에게 내려오는 듯 시종 하행(下行)하고 있는데요, 특히 4절의 “내 머리에 부은 기름 넘치는...”에선 그야말로 흘러내리는 듯 실감이 나고, 2절의 “메마른 영에 힘 솟아”에서 옥타브인 8도 도약(跳躍)하는 것이 영혼이 소생하여 분출됨을 느낄 수 있고, “찬양을 받으리”, “영원히 살리라” 등에서도 우리가 높이 주님 앞에 인도되어 기쁨을 누리는 듯합니다.
이 찬송은 멜로디가 너무도 아름다워 많은 작곡가들에 의해 성가대용 앤덤(Anthem)으로도 만들어져 예배 때에 자주 연주되고 있습니다.
2006. 12. 11
곧 오소서 임마누엘
지난 주간 저는 국립합창단과 함께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천진의 인민대회장에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전곡을 천진대학 합창단과 연합하여 함께 연주하게 되어있었는데요, 수 천석에 이르는 좌석이 다 매진되고, 성황을 이루게 되니까 당국에서 연주 전날 갑자기 연주를 취소해 버린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을 비롯하여 수천 명이 모이고 ‘메시아’를 연주하게 되니까 무슨 소요라도 일까 염려되었던 모양입니다. 급작스레 입장료를 환불해 주고,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 겨우 연주는 하게 되었는데, 객석 복도에도 수백 명이 서서들을 정도로 입추에 여지가 없이 꽉 메운 청중들 앞에서 연주를 하였습니다. 그들로서는 놀랍고 가슴 벅찬 일이었지요. 거의 일 세기만에 공산주의의 나라에서 메시아를 들을 수 있다니요.
''''''''할렐루야’를 연주할 땐 모두들 하나같이 기립하여 하나님께 찬양하였고, 감격하여 눈물을 보인 이들도 많았습니다. 연주 후 종교곡인 ‘메시아’를 연주했다는 이유로 초청 측 몇 분은 조사를 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북경에 오니까 백화점을 비롯하여 거리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토록 ‘메시아’연주를 허락하지 않던 이들이 ‘메리 크리스마스’ 장식은 하고 있으니... 곧 이 땅에도 뿌린 복음의 씨앗이 열매 맺을 날이 멀지 않고나 생각하며 그 곳에도 오시고 계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경건히 손을 모았습니다.
대림절(待臨節, Advent)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절은 강림절(降臨節), 대강절(待降節)이라고도 하는데요, 크리스마스 전 4주간을 말하지요.
크리스마스로 부터 4주 전 주일(11월 27일부터 12월 3일까지)이 ‘대림절 첫째 주일’이 되고 그로부터 크리스마스 전날까지의 기간입니다. 실제 대림절은 예수님께서 이천년 전, 첫 번 크리스마스에 육신으로 오신 것과 말씀과 영으로 지금 우리에게 현재적으로 오시는 것, 그리고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영광으로 오실 것을 생각하며 기다리는 즐거운 분위기의 절기입니다.
이미 8C부터 불려온 ‘곧 오소서 임마누엘’(Veni Emmanuel)의 노래 속에 그 의미가 다 들어있는 것이죠. 라틴어로 된 원래의 이 ‘곧 오소서 임마누엘’의 찬송은 각 절마다 ‘오’(O)라는 감탄사로 시작하기 때문에 ‘오’가 많다고 하여 ‘오 대 송가’(大 頌歌, The Great O''''''''''''''''''''''''''''s)라고 불립니다.
이 시는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이름과 예언자적인 형식을 사용하고 있는데요, 예부터 12월 17일부터 23일까지 7일 동안 저녁 예배 시에 나누어 부르는 응답송입니다.
‘오 대 송가’의 원문 중에서 중요한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12월 17일엔 “오 지혜여(O, Sapientia), 오셔서 지혜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 18일엔 “오 주여(O Adonai), 오셔서 당신의 팔로 저희를 건져 주소서”, 19일엔 “오 이새의 뿌리여(O Radix Jesse), 오셔서 지체 없이 우리를 구하여 주소서”, 20일엔 “오, 다윗의 열쇠여(O Clavis David), 오셔서 어둠과 그늘 속에 앉아있는 감옥에서 풀어 주소서”, 21일엔 “오 여명이여(O Oriens), 오셔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 속에 앉아있는 자들을 비추어 주소서”, 22일엔 “오 만국의 왕이여(O Rex Gentium), 오셔서 당신께서 흙으로 만드신 인간을 구 하소서”, 23일엔 “오 임마누엘이여(O Emmanuel), 오셔서 저희를 구 하소서” 이렇듯 매우 긴 장시(長詩)를 저 유명한 영국의 닐(John Mason Neale, 1818-1866)목사님이 발췌하고 영어로 번역하여 만든 것입니다.
닐 목사님은 캠브리지를 졸업하고 영국 국교회 목사가 되었는데, 옥스퍼드 부흥운동(Oxford Movement)에 깊이 관여하는 바람에 그만 성직을 박탈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후에 색크빌(Sackville)대학의 학장도 지내고, 저술가로 활동했는데 특히 고전 시학(詩學)의 권위자로 중세 로마, 그리스 등의 훌륭한 찬송 시들을 많이 발굴해서 영어로 번역하였지요. 옛 노래를 소개하고 보전하는 데 있어 매우 귀중한 공헌을 한 분입니다. 그가 중세 찬송가에서 영어로 번역한 찬송은 상당히 많은데 우리 찬송가에는 이 찬송과 ‘예루살렘 금성아’(538장) 등 몇 찬송만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대 오 송가’라는 별명까지 붙은 이 찬송이 우리 시로 번역되면서 ‘오’ 감탄사가 다 빠져 버린 것은 참 아쉬운 일입니다. 영어 찬송가에는 매 절마다 “O come, O come”, “O Emmanuel” 하는 데 말입니다.
VENI EMMANUEL의 이 곡조는 1856년에 출판된 ‘찬송집’(The Hymnal Note)에 처음 시려 발표가 되었는데요, 곡명 밑에 ‘플레인 송’(Plain Song)이라고 쓰여 있는 것은 중세 때 불린 성가인 그레고리안 찬트(Gregorian Chant)란 말이고, Mode I이라고 하는 것도 찬트에 있어 제1교회선법(敎會旋法, Church Modes)이란 말인데, 지금의 장단조(長短調)가 생기기 이전에 음계(音階)를 형성하는 음조직을 말합니다. 제1선법은 ‘도리아 선법’(Dorian mode)이라고 불리는데, ‘레’(d)에서 옥타브 위까지의 음역을 가지는 선법이죠.
"이 찬송은 경건하고 엄숙하여 대림절 분위기를 자아내는 매우 아름답고 귀한 찬송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Amen. Come, Lord Jesus)
2006. 12. 13
이새의 뿌리에서
교회의 제단에 예쁜 네 개의 촛대가 장식되고 그 곳에 불이 켜졌습니다. 네 개의 촛대에 불을 다 켜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더 기다려야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대림절 첫째주일에 촛불 한 개, 둘째주일에 두 개 이렇게 대림절 촛대에 매 주일 한 개씩 불을 켜가며 어두운 세상을 밝히시려 오신 빛 되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상징이죠.
이 계절이 되면 거리가 온통 크리스마스트리로 화려합니다마는, 일찍이 유럽에서부터 유래한 대림절트리는 작은 전나무나 가문비나무에 매일, 혹은 매주일 새 불을 하나씩 달면서 성경을 읽고, 카드에 성경구절을 베껴서 그 옆에 놓아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온통 불빛으로 가득하게 한 것입니다.
성탄목(聖誕木)에 다는 장식에도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빵과 촛대, 장미, 사과 등 네 가지를 달게 되는데요, 주님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영혼의 빵으로 오셨기에 빵을, 암흑 가운데 빛으로 오셨기에 촛불을,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돋아나 장미꽃 피는 천국을 이루셨기에 장미꽃을, 그리고 둘째 아담으로 오셨기에 첫째아담이 먹었던 과일을 의미하는 사과를 매답니다. 바로 이러한 대림절의 정신이 이 찬송가에 가득 담겨있습니다.
작사자란에 ‘옛 라틴-독일 마리아의 노래’(Altes lateinisch-deutsches Marienlied)라고 표기되어 있듯이 이 노래는 독일에서 아주 오래되고 유명한 성탄찬송인데 유명한 학자이며 음악 편집자인 베이커(Theodore Baker, 1851-1934)가 영어로 번역하여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이사야서 11장 1절에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라 했고, 10절에서도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라고 쓰여 있는데, 여기에 ‘이새’는 다윗왕의 아버지를 말하죠.(마 1;6) 예수님이 다윗의 가계(家系)에서 태어 나셨기 때문에 ‘이새의 뿌리’라 함은 예수님을 칭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다윗의 왕통(王統)을 잇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마 1;17)
여기에서 ‘새 싹’이 돋아난다는 뜻은 메시아가 나실 것을 의미하지요. 또 이 노래에서 ‘새 싹’은 성경에선 ‘한 싹’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연약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연약한 것 같으면서도 그 ‘싹’은 튼튼하고 생명력이 있는 ‘싹’이죠. 그래서 드디어 아름다운 ‘장미꽃’을 피운 것입니다.
“황무지가 장미꽃같이”란 찬송에서 노래하듯이 성경에선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사 35;1)라고 했는데, 여기에 ‘백합화’는 ‘장미’라고도 번역한다는군요.
그것도 “이 추운 겨울 밤”에 말입니다.
장미꽃의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빨간 장미... 핏 색깔이죠.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십자가에서 빨간 피를 다 쏟지 않으셨습니까?
차이코프스키(P.I.Tchaikovsky)가 작곡한 유명한 ‘성사곡’(聖思曲, Legende)이란 유명한 노래가 있습니다.
“예수님 어렸을 때에 뜰 앞에 꽃 밭 만들고 물주며 정성 다하여 장미꽃 가꾸셨네. 장미꽃 만발할 때 동무들을 불러 보이니 꽃송이 모두 따가고 빈 가시만 남겨 두었네. 꽃도 없이 무엇으로 화관을 만들렵니까? 다시 보아라. 거기에 가지가 남아있음을. 만백성 죄를 위하여 가시관 쓰신 이마에 그 붉은 장미 꽃 같은 보혈의 피 흘리셨네”
주님께서 피 흘려 우리를 구원하시려 하늘로부터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죠. 예수님의 나심은 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하였습니다. 복음서에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 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요1;45)하지 않았습니까?
1절의 “옛 선지 예언대로”란 뜻은 모세를 비롯하여 성경의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을 뜻하는데, 특히 ‘복음의 예언자’로 불리는 이사야는 메시야의 구속사역에 가장 많은 예언을 남겼지요. 이사야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해 구약의 어느 책보다 더 많은 예언을 담고 있기 때문에 2절에서 “이사야 예언대로”란 구절이 나오는 것입니다.
뒤이어 “어리신 우리 주 동정녀 마리아의 몸 빌어 나셨다”는 가사도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사9;6)라는 말씀에 대한 성취이고, “그 영광 찬란한 빛 어둠을 쫓았다”란 부분도 역시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당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사9;2)라는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큰 빛’으로, 찬송에서 ‘찬란한 빛’으로 표현된 이 빛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 의의 빛, 참된 빛으로 오실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곡명 ES IST EIN ROS'''' ENTSPRUNGEN는 ‘장미 한 송이 피었다’란 뜻으로 독일에서 불리던 옛 노래인데요, 1599년 꼬롱(Cologne)에서 출판된 ‘독일 가톨릭 성가집’(Alte Catholische Geistliche Kirchengesang)에 처음 발표 되었습니다. 특히 이 곡의 화성은 독일의 유명한 루터교 교회음악가인 프레토리우스(Michael Praetorius,1571-1621)가 붙인 것인데 1609년 그의 ‘성가집’(Musae Sionae)에 수록한 것입니다.
단순한 구조를 가진 이 찬송은 경건하고 엄숙하여 대림절 분위기를 자아내는 매우 아름답고 귀한 찬송입니다.
2006. 12. 20
천사들의 노래가
젊은 시절 이야기입니다. 군에 가서 첫 번 맞이한 크리스마스, 한밤중에 저는 부대 높은 곳에 자리 한 지휘관실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하늘엔 별들이 높이 빛나고, 흰 눈 덮인 산천은 고요했습니다. 문득 고향 생각에 잠기게 된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외로웠습니다. 정든 교회친구들과 성가대원들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아마 음악예배를 마치고 부속실 난롯가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며 밤을 새우며 있겠지. 그런저런 생각에 젖어 있다가 지난 해 성탄절 음악예배 때 부르던 캐럴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섣달 스무 닷샛날에 품품품...” “아기 예수 구유에 고이 잠드셨네” ... 그런데 얼마가 지났을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글쎄 하늘의 그 많은 별들이 저와 함께 노래하기 시작하지 않겠어요? 저는 그때껏 그토록 아름답고 화려한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에 이어‘고요한 밤’이 들려오고 ‘노엘, 노엘’, ‘할렐루야’ 등등. 내가 아는 많은 성탄 노래가 다 연주되고 있었는데 저는 너무나도 황홀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위병소 쪽에서 들려오는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 축하합니다.”라는 외침 소리에 화들짝 깨어났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마도 내가 들었던 그 아름다운 천사들의 노래도 인근 시골교회 성가대원들이 새벽 송을 돌며 부른 노래가 아니었겠나 싶지만, 그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여 집을 떠나 외로워하는 주님을 사랑하는 고독한 한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와 위로해 주시고, 하늘의 음악을 선물로 주신 건 아닐까 상상해보기도 합니다.
작자미상(Anonymous)로 되어있는 이 찬송은 원래 프랑스에서 예부터 불려오던 캐럴인 ‘Les anges dan nos Campagnes’인데요,
이 노래를 번역한 영어 찬송시도 여러 편이 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1937년 미국 보스턴의 신학자인 마레트(Earl Bowman Marlatt, 1892-?)교수가 번역한 ‘Angels We have heard on high’가 실려 있지요.
찬송 곡조 GLORIA는 1855년 ‘Non veau recueil de Cantigues’에 지금의 이 가사를 붙여 동시에 발표되었는데요,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던 멜로디를 반즈(Edward Shippen Barnes)가 아름답게 편곡하여 발표한 것입니다.
음절식(音節式)으로 되어 있고 비교적 단순한 멜로디인 설명조의 전반부에 비해, 후렴은 멜리스마식(多音式, melismatic style)으로 되어있고 화려합니다. 멜리스마식이란 멜로디에 있어서 모음(母音) 한 음절에 많은 음표가 붙어 잇는 것, 즉 ‘영’의 모음 ‘ㅕ’에 16개의 음표가 붙어 있는데, 이런 가사형식을 말하지요.
또 이는 중요한 단어에만 붙이기 때문에 ‘기쁨동기’(動機, joy motif)라고도 하고요. 또 어떻게 부르다보면 ‘여---엉’하는 것이 “여-호호호호”하며 웃는 소리 같기도 합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웃을 일이 없던 우리에게 잔칫날 ?! 걋? 기쁨을 주셨으니까요.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가운데 가장 노래가 많이 들어있는 책이지요.
칸티클(Canticle)이라 일컫는 그리스도의 성탄에 관련된 송가(頌歌, 눅1;46-55, 1;68-79, 2;29-32)가 들어있고, 천사들의 노래가 들어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 지역에서 목자들이 밤에 들에서 지내며 그들의 양 떼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한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고, 주님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니,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중략) 갑자기 그 천사와 더불어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더 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눅 2;8-14)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최초로 인간이 ‘하늘성가대’(天上聖歌隊)의 찬양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이어서 목자들은 급히 예수님 나! 신 곳을 찾아 경배하였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본 모든 일이 자기들에게 일러주신 그대로임을 알고, 돌아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찬미하였다.
”(눅 2;20)고 했는데, 천상성가대로부터 보고 배운 찬양을 부르게 됨으로 땅(地上)에서의 화답송이 이루어진 것이죠.
여기에서 우리는 성가대의 존재의의에 대해 주목하게 됩니다.
예배에 있어서 성가대는 먼저 목자들이 목격했던 하늘성가대의 모형(模型)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원형(原形)은 어디까지나 천상에 있습니다. 성가대원들이 입은 가운, 즉 성의(聖衣)는 하늘 천사들의 날개라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영의 눈과 귀를 가지고 하늘의 음악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성가대는 회중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찬양하는 지상성가대(地上聖歌隊)의 기능도 함께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AD 129년 로마의 텔레스포루스(Telesporus) 대주교가 크리스마스 밤에는 믿는 모든 이들이 “하늘 높은 곳에 영광, 땅에는 평화”하는 이 천사들의 노래를 부르도록 칙령을 내린 이후 이 노래가 많이 불리게 되었는데, 오늘도 우리 마음의 구유에 주님을 모시며 하늘의 찬양을 듣고 싶습니다. Gloria in excelsis Deo!
2006. 12. 25
구주를 생각만 해도
저는 교회에서 성가연습을 할 때, 찬양 곡 연습에 앞서 먼저 주보에 나와 있는 그날 예배 때에 부를 찬송 서너 장을 함께 부르며 찬송공부를 합니다. 성가대는 찬양 곡뿐만 아니라 예배에 사용되는 모든 음악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찬송인도자로서 음정, 박자를 비롯해서 바른 속도를 유지하며 불러야하기 때문이지요.
어느 날이었습니다. 바로 이 찬송을 부르게 되었는데, 대원들의 표정이 시무룩하고 무표정한 거에요. 지휘자인 제가 가사를 생각하면서 기쁘게 부르라고 강조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이야기를 했죠. “제가 오래 전 노총각 때, 어느 여인에게 홀딱 반하게 되었어요. 그녀와 결혼을 약속하고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하다가 학생들과 엠티를 가느라 떨어져 있게 되어 얼마나 보고 싶던지 새벽에 바닷가에 나가 모래사장에 그녀의 이름을 크게 써 봅니다. 가로 10미터, 세로 10미터...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은 언제나 생각만 해도, 불러만 봐도 행복하죠.”
그랬더니 성가대원들이 저와 그 장본인인 제 아내를 번갈아보면서 깔깔대며 웃는 거예요.
“이제 이 찬송가에서 ‘구주’란 대목에 여러분들의 배우자이름,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붙여서 불러봅시다.”하고선 “시작!”했더니 “영자를 생각만 해도” “철수를 생각만 해도”하며 벙글벙글하면서 한바탕 웃음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저는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래, 애인은 그렇게 좋아하면서 예수님은 애인만 못하다는 것입니까? 주님을 깊이 생각하며 다시 불러봅시다.”
11C 라틴 찬송으로 표기되어있는 이 찬송은 오랫동안 중세의 신비주의자였던 클레아보의 성 베르나르도(St.Bernard of Clairvaux, 1061-1153)가 쓴 시로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최근 12 C 말엽에 영국의 시인이 쓴 ‘거룩한 예수의 이름’(Jesus, dulcis memoria)이란 제목의 시를 캐스월(Edward Caswall, 1814-1878)이 번역하여 ‘가톨릭 찬송’(lyra Catholica)에 발표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캐스월도 영국의 닐(Niel)박사에 버금가는 찬송가 발전에 지대한 공적을 쌓은 분이지요. 영국 예이틀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취드웰(Chidwell)과 말보로(Malborough)에서 공부하고, 옥스퍼드의 부래스노스 대학을 졸업한 후 목사안수를 받고 스트라드퍼드에 있는 지하성채교회의 부목사로 시무했습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의식에 관해 관심을 갖고 많은 연구를 하였고, 프랑스어로 된 ‘제단교본’(Altar Manual)을 번역 출판 하는 등 활약을 했습니다. 캐스월의 번역은 원작의 내용을 거의 완벽하게 살릴 뿐 아니라 그 시가 아름다워 언어구사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종래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당시 유명한 뉴맨이 이끄는 에드그베이스튼(Edgbaston)의 기도원에 들어가 서 경건한 생활을 하며 자선과 저서에 큰 이바지를 했습니다.
이 찬송 곡인 ST.AGNES는 다익스(John Bacchus Dykes, 1823-1876)가 작곡하여 1866년 그레이(Gray)의 ‘영국교회용 찬송가’(Hymnal for use in the English Church)에 발표했는데, 다익스는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최고의 작곡가이지요. ‘거룩 거룩 거룩’(9장)의 작곡가말입니다. 영국의 헐(Hull) 태생으로 열 살 때부터 왕실교회에서 오르간 배우고, 웨이크필드(Wakefield)와 켐브리지의 성 캐트린(St.Catherine)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후 성직자가 되어 더햄(Durham)에서 평생토록 목회를 하면서 300여 편에 이르는 찬송을 작곡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이 찬송을 비롯하여 ‘거룩 거룩 거룩’(9장), ‘성전을 떠나가기 전’(59), ‘귀하신 주의 이름은’(81장), ‘오 젊고 용감하신’(129장), ‘성도들아 다 나아와’(140장),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429장), ‘바다에 놀이 치는 때’(477장), ‘주와 같이 되기를’(508장) 등 9장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는 말씀이 관련 성구로 표시되어있는데요, “깊이 생각하라”라는 대목이 눈을 끕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모실 곳도, 주님과 사랑을 나눌 곳도 우리의 마음이고 보면 생각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생각 없이 예배드리는 이들, 생각 없이 찬송하는 이들에게 이 히브리서 저자는 “깊이”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깊이, 깊이...
이 찬송에서 또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요. 마디 수를 세어보면 4343, 그러니까 모두 14마디의 불규칙적인 구조를 가지죠. 다른 노래처럼 “내 맘이 좋거든”이나 “얼마나 좋으랴”에서 4마디가 아니고, 1마디 부족한 3마디로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노래할 때 그 점에 유의해야겠고, 이는 “구주를 생각만 해도”는 땅의 숫자인 4마디, “내 맘이 좋거든”은 하늘의 숫자인 3마디, 합하여 완전 수 7마디라 신앙적으로 확대 해석할 수도 있겠지요.
5절의 마지막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는 ‘영광송’(Gloria Patri)이죠.
2006. 12. 26
종소리 크게 울려라
매해마다 새해 0시가 되면, 보신각에서 제야(除夜)의 종을 울리죠. 울려 퍼지는 그 소리를 들으며 시인은 기억하기조차 싫은 옛 것들을 모두 울려 보내자고(Ring out) 읊습니다. 시기도, 분쟁도, 옛 생각도, 질병도, 고통도, 탐욕도, 전쟁도, 어둠도 모두 울려 보내자고요...
데엥- 데엥- 데엥- 데엥- 이탈리아 여행 중에 밖이 소란스러워서 보니까 이 날에 집에 있는 물건들을 다밖에 집어 던져버리더라고요. 집안이 비어있어야 좋은 것이 들어 온다나요?
보신각에서는 제야(除夜)의 종을 서른세 번치지요.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28계 33천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4대 문을 열면서 33번 쇠북을 치는 파루(罷漏)도 그렇고, 천민(天民)들이 건강하고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하는 관습이라고는 하지만, 돌이켜 33번의 종소리는 기독교적으로 해석해 볼 때 예수님의 생애를 뜻하기도 하지요.
새해를 맞이하며 종소리를 들으면서 그리스도의 해를 소망하며 선한 것들을 불러들이며 소원하면 어떨까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이 찬송의 관련 성구인데요, 이 찬송에서 노래하듯 옛 것의 자리에 새 것을, 순결한 삶을, 새 맘을, 평화를, 기쁨을, 사랑을, 자유를, 그리고 주 예수를 맞아드리자고(Ring in) 기원해야겠습니다.
이 유명한 시를 쓴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은 영국 링컨셔(Lincolnshire)의 서머스비(Somersby)태생으로 19C의 대표적인 시인이죠.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테니슨과 브라우닝(E.B.Browning, 1806-1861)을 들 수 있습니다.
테니슨은 오랜 링컨셔 가문에서 12명의 자녀 중 4번째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교구 목사였습니다. 두 형과 함께 라우스 그래머스쿨에 입학했으나 좋아하지 않아서 학교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재정 형편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문학공부를 시켰는데, 테니슨은 조숙해서 십대가 되기 전에 포프, 스콧, 밀턴의 문체대로 글을 썼다고 하는군요. 그는 바이런의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18세 때 이미 첫 시집을 내는 등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850년에 그는 역작인 장편 시인 ‘추모하면서’(IN MEMORIAM)를 발표했는데, 친구의 죽음을 애도한 이 시로 인하여 유명하게 되고, 드디어는 영국 왕실이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에게 내리는 계관시인(桂冠詩人, Poet Laureate)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게 되어 명예와 부를 동시에 얻게 되었습니다. 테니슨은 찬송 시를 짓진 않았지만 그의 시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세계가 있었고, 주님을 찬양하는 구절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이 찬송은 ‘추모하면서’에 있는 내용을 발췌하여 4행시 8절로 된 찬송으로 만든 것으로, 우리 찬송가에는 2, 4, 7, 8절을 뽑아 4절로 되어 있습니다. 예전엔 찬송가가 8절 정도는 보통이었는데, 요즈음엔 그 긴 찬송들을 3절이나 4절 찬송으로 요약해서 만들었죠.
이 곡조 WALTHAM은 작곡가 칼킨(John Baptiste Calkin, 1827-1905)이 미국의 뉴져지 주 벌링턴(Burlington)에 있는 성 마리아(St.Mary)학교에서 국기 게양할 때 부르는 ‘깃발을 날려라’(Fling out the banner, let it float)라는 곡으로 작곡한 것인데, 테니슨의 시와 만나 세계적인 곡이 되었습니다.
칼킨은 영국의 크로이든(Croyden)태생으로 음악교사인 아버지로부터 음악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크로이든 음악원(Croyden Music Academy)을 졸업했습니다. 그는 16세 때에 이미 영국 전역에 순회연주를 다닐 만큼 탁월한 오르가니스트가 되었고, 28세 때에는 모교인 크로이든 음악원 교수가 되어 평생을 오르가니스트로, 작곡가로, 합창지휘자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이 한 편만 수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유명한 테니슨의 시는 이렇습니다.
“울려라 우렁찬 종아. 거친 창공의 날아가는 구름, 얼어붙은 빛에 이 해는 오늘 밤 사라져간다. 울려라 우렁찬 종아. 이 해를 가도록 하라/ 울려 보내라 낡은 것을, 울려 맞으라. 새로운 것을, 울려 퍼져라 흰 눈 너머로, 기쁜 종이여 이 해는 가니 가도록 두어라. 거짓을 울려 보내고 진실을 울려 맞으라./ 울려 보내라 보지 못할 죽은 자들, 생각으로 마음의 기력을 앗아가는 슬픔을, 부자와 가난한 자의 반목을 울려 보내고, 만민 위한 구제책을 울려 맞으라./ 울려 보내라 서서히 쇠퇴할 주의주장을, 고리타분한 당파싸움을, 울려 맞으라. 아리따운 예절과 순수한 법을 가진 고상한 삶의 양식을/ 울려 보내라 결핍과 근심과 죄악을, 오늘의 차가운 불신의 마음을, 내 애도의 노래를 울려 보내고, 더 풍요한 시인을 울려 맞으라. 울려 보내라. 지위와 가문의 그릇된 자만을, 세상 사람들의 중상과 모략을, 울려 맞으라. 진리와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을, 다함께 선을 사랑하는 마음을/ 울려 보내라. 온갖 해묵은 고질병을, 황금을 좇는 척박한 탐욕을, 지나간 수천의 전쟁을. 울려 맞으라, 천년의 평화를/ 울려 맞으라. 용기 있고 자유스런 사람을, 더 관대한 마음과 더 다정한 손길을, 이 나라의 어둠을 울려 보내고, 오실 그리스도를 울려 맞으라.
2006. 12. 29
아침 해가 돋을 때
언젠가 일출을 보러 해변에 나갔다가 감격한 적이 있습니다. 수평선이 용광로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갑자기 태양이 뻥하며 튀어 오르는 것 아닙니까? 일출광경은 바다에서 보나 산에서 바라보나 언제나 장관이지요. 넋을 잃고 한참을 보다가 해가 얼마큼 하늘에 떠오르자 한줄기 빛이 바다를 가르며 제 앞을 비추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신기하기도하여 멀리 뛰어가다 다시 바다를 보아도 해는 나를 직선으로 나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아하,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비추고 있었구나. 새벽이나, 대낮이나, 밤중에도... 단지 내가 깨닫지 못했을 따름이지.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 서두에는 절망 가운데서 구원해 줄 수 있는 장엄한 선언이 펼쳐지지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4) 이 장면을 하이든이 지은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라지네. 그 거룩한 빛 앞에서 어둠의 그늘 다 사라지네. 혼돈함은 다 물러가고 새 질서 생겼네. 저 마귀무리들은 겁이나 깊은 지옥 밤 속으로 다 도망가네. 절망과 분노, 공포 그 뒤를 따라 도망가네. 새 천지 열렸네. 하나님 말씀에 새 천지 열렸네.” 이것은 인간과 세계 내에 있는 모든 존재에게 그 참된 존재(存在) 가치와 삶의 의미를 제공해 주는 계시의 찬란한 첫 빛줄기라 할 수 있습니다.
작사, 작곡 모두 누가 지었는지 알려지지 않은 작자미상의 이 찬송가는 1931년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신정찬송가’에 ‘분음을 앗김’(Sunshine minutes)이란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이 찬송가는 미국의 19C와 20C초의 복음찬송 스타일이지만 영어가사나 제목이 없는 것으로 보아선 꼭 미국인이 쓴 복음찬송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찬송 시의 주제는 ‘햇빛 되게 하소서’입니다. 7777의 운율로 되어있는 이 시에서 악구의 마지막마다 “햇빛 되게 하소서”를 여덟 번 반복함으로서 간절히 간구하고 있죠. 언더우드(John T. Underwood)목사는 1989년 영어로 번역하면서 이 부분을 “Be Thy sunshine, shed Thy light”라고 했는데, ‘햇빛 되게’의 강박자이면서 당김음인 ‘되게’를 ‘sunshine’으로 표현함으로 원문보다 자연스러우면서도 뜻을 강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燈?)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요 5;14-16)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 찬송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성도들의 사명에 대한 이 말씀을 팔복에 이어서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성도들이 복을 받는 것은 수고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딤후 14;7-8, 히 13;2-3)이지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게 합니다.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근본적인 일은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성실히 감당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소금과 빛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소금은 가만히 있어 제게 오는 것에 대한 수동적 역할임에 반해 빛은 끝없이 찾아가서 능동적으로 비춤으로써 그 역할을 감당하지요. 즉 빛은 사물을 밝게 해 주거나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와 같이 신자들도 빛과 같은 생활로 모범을 보여 남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널리 전파해야겠습니다.
작가 박완서 씨는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란 묵상 집에서 세상의 빛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 자기 허영심에 딱 들어맞는다면서 어떻게 해야 빛이 되냐고 물었습니다. 빛이 되려면 제 몸을 태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세상의 빛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는 어렵지만 “그 대신 제 언행이 주님의 빛을 기리며, 부지런히 따라 움직이는 해바라기가 되게 하소서”라고 겸손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2절과 3절에 ‘새로 오는 광음’, ‘빠른 광음’의 ‘광음’(光陰)은 해와 달이라는 뜻으로 시간이나 세월을 뜻합니다.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이 빠르다고 할 때 ‘광음여류’(光陰如流)라고 하고, 세월의 흐름이 화살과 같이 빠르다고 할 때 ‘광음여시’(光陰如矢)라 하는데, 그 광음입니다. 그러니까 “새로 오는 새해를” 혹은 “새로 오는 시간”으로, “빠른 세월 지날 때”로 생각하며 불러야겠지요.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아침 해가 돋을 때 만물 신선하여라.”라고 노래하노라면, 풋풋한 아침 공기와 함께 오감(五感)이 동원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한 해의 아침, 모든 존재의 시작(the Beginning)이시고, 원인(the Cause)이시며, 근원(the Source)일 뿐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다짐하며 드리는 첫 기도로 제격입니다.
2007. 01. 12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지난번 합창단과 함께 중국에 갔을 때입니다. 안내원이 우리를 소위 짝퉁 시장이라는 곳에 풀어 놓았는데, 우리 여자단원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쇼핑을 하더라고요. 사오층이나 되는 건물 가득히 들어찬 가짜 명품들... 그 값나가는 고급 명품 가방이며, 코트, 구두, 목걸이, 시계 할 것 없이 많은 가짜 명품들을 한가득 사들곤, 진짜명품은 얼마를 하는데 이렇게 싸게 샀다는 둥, 얼마를 깎아 샀다는 둥 자랑을 하며 좋아하는 겁니다. 어떤 이는 진짜 명품 핸드백에 들어갈 같은 디자인의 짝퉁 손지갑을 샀다면서 기뻐하기도 했지요. 싸구려 가짜 손지갑이 진짜 명품과 어울려 진짜 같이 보이게 하려는 속셈 아니겠어요? 그 이후로 저는 여자들이 멋을 부리고 들고 다니는 명품 진짜 핸드백마저도 모두 가짜로 보이던데요. 어떻습니까? 진짜와 가짜가 잘 구별! 되지 않는 세상, 비슷한 것은 모두 가짜일진대, 우리는 혹시 짝퉁신앙을 갖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이 찬송 시를 지은 분은 스코틀랜드의 마테슨(George Matheson, 1842-1906)목사님인데요, 그는 개신교 목사로서 당대 뛰어난 신학자요 웅변가요 저술가입니다. 그는 글라그고우(Glasgow)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시력을 잃어 맹인이 되었으나 좌절하지 않고 장애를 극복하여 대학을 마쳤습니다. 오랜 후에는 에든버러(Edinburgh) 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도 받았으니까요. 그는 24세 때 목사가 되었는데, 문서 전도 작가로 활동했고, 특히 명설교자로서 이름을 떨쳤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테슨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위해 각처에서 그가 있는 에든버러에 모여들기도 했다고도 하고요,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도 설교를 했다고 하니까 당시 꽤 훌륭한 설교자였던 것 같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자는 주제로 되어 있는 이 찬송 시는 덤바톤셔(Dumbartonshire)의 라우(Row)에서 지었다고 하는데, 자신이 발행한 ‘성가’(Sacred Songs, 1890)에 처음 발표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최고의 가치이신 하나님은 피조물로부터 섬김을 받으시길 원하시지요. 그래서 이 찬송의 1절에서는 헛된 신과 유일하신 하나님을 대비 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일렀듯이 십계명의 중에 제4계명까지가 하나님 소원 아닙니까? 그 중에서도 첫째 되는 계명이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와 셋째 계명인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를 상기 시킵니다.
2절에서는 둘째 계명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 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 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을 떠 올리게 합니다. 이 찬송에선 세상의 온갖 우상과 인간사에 있어서 하나님 이외의 재물과 명예, 모든 부귀영화까지도 우상의 부류에 넣고 있지요. 십계명의 넷째 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했는데, 3절에서 한분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도 하나가 되어야하지 않겠냐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더욱이 마음에 드는 가사가 있습니다. 원문과는 거리가 있습니다마는 “주님의 백성 서로 헤아려”에서 우리말의 ‘헤아려’라는 가사인데요, 원문은 “Each sees one colour of Thy rainbow light”로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서로 헤아려 산다고 하면 시기와 미움도 사라질 것이고 오직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는 하나가 되지 않겠어요?
곡 제목인 PENITENTIA는 ‘참회’라는 뜻인데, 가사내용과는 좀 거리가 있죠? 원래 이 곡은 영국의 교회음악가인 디어리(Edward Dearle, 1806-1891)가 “아버지여,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만나오니‘(Father, again in Jesus)란 찬송곡조로 쓴 것입니다. 이 곡은 설리반(Arthur Seyour Sullivan, 1842-1900)이 편집해 펴낸 찬송곡집(Church Hymns with Tunes, 1874)에 처음 발표하였는데, 이 곡은 스톤(Samuel J. Stone, 1839-1876)목사님의 찬송 ‘땅의 곤고와 고생’(Weary of earth, and laden with my sin)의 곡조로도 불렸거든요. 그 찬송의 가사에 참회한다는 말이 나오면서, ‘참회’란 제목이 붙게 된 것입니다.
참고로 설리반은 런던 출신으로 영국왕실 성가대와 왕립학교를 거쳐 라이프지히 음악원에서 유학한 후 왕립음악원 작곡과 교수로 활동한 아주 유명한 작곡가요,지휘자이며, 오르가니스트이지요. 많은 오페라와 오페레타, 교향곡, 서곡, 협주곡,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 많은 작품을 남겼고, 당시 런던에서 인기를 독점했던 음악가인데, 작위 칭호도 받은 음악사적 인물입니다.
이단(異端)이란 말이 있지요. 한자로만 보자면 ‘끝이 다르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겉으로 보기엔 똑 같은 것 같은데, 끝이 조금 다른 것. 그야말로 짝퉁 교단, 짝퉁 교회인 것이죠. 교회에서 정통적 교의(敎義)에 벗어난 교단을 이단이라고 하는데, 이단이 횡횡하는 이즈음 우리들의 신앙도 짝퉁신앙은 아닐까 점검해 보며 참된 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2007. 01. 22
저 죽어가는 자 다 구원하고
합창 연주회에서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끄는 곡 가운데 ‘마른 뼈’(Dry Bones)란 곡이 있습니다. 에스겔이 본 마른 뼈 환상을 내용으로 여러 뼈다귀들이 서로 움직이고 붙고 하는 장면이 반음계(半音階)적으로 올라가면서 뚝딱 똑딱거리는 여러 타악기 소리와 함께 소란을 피우는 노래이지요. 합창단원들도 처음엔 조용히 노래를 시작하다가 팔과 다리를 움직이고 장난감 망치로 옆 사람 머리도 때리곤 하며 웃음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겔 37;7-8) 이 말씀에서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어요.
성가대에서 찬양을 연습하는 과정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고요. 먼저 “소리가 나고”는 ‘♩ ♪♪♪♪♩’리듬연습이며, “움직이더니”는 아까 그 리듬에 ‘솔미파솔솔솔’ 음높이를 가진 멜로디 연습이라 할 수 있죠.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는 옆 사람과 일치된 소리로 맞추는 융합(融合, blending)이며, “서로 연락 하더라”는 다른 성부(聲部, part)를 들으면서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가 균형(均衡, balance)된 소리 만들기 입니다. “힘줄이 생기고”는 셈여림(强弱, dynamics), “살이 오르며”는 빠르기(速度, tempo), “가죽이 덮이나”는 정확한 발음(發音, diction) 등을 연습하여 완성된 음악이 됩니다. 그런데요, 성경에 보니까 이렇게 완벽하게 조립이 되어도 생기(生氣)가 없으면 ‘사망을 당한 자’(겔 37;9), 곧 죽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훌륭한 음악을 연주해도 생기가 없으면 죽은 음악이라는 말씀이지요. 우리는 그동안 생기가 없는 음악, 죽은 찬송을 얼마나 불렀을까요? 영(靈)이 없는 찬송,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부르는 찬송은 죽은 찬송이라는 뜻 아닐까요?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37;10)라고요. 하나님의 숨결로 노래할 때 기쁨이 살아나고 감사가 넘치는 살아있는 찬송이 될 것이며, 나아가 모인 모든 이들의 심령까지도 부술 군대와 같이 능력 있는 찬송이 되겠지요.
이 찬송은 미국의 여류 맹인 복음성가 작가인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1820-1915)가 1869년 여름 뉴욕에서 집회 도중 결단의 시간 후에 한 청년이 회개하고 구원 받는 사건을 보고 그 날 밤 집에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단숨에 작사했다고 합니다. 이 찬송 시는“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에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1-2)는 에베소서 2장 1절부터 5절까지의 내용을 배경으로 했는데요, 사실 크로스비는 그와 함께 활동한 도온(William Howard Doane, 1832-1915)으로부터 이 시를 짓기 며칠 전 ‘멸망하는 자 구출’(Rescue the perishing)이라는 시를 부탁받았었거든요. 저는 하나님께서 크로스비에게 이 시의 영감을 주시려고 그러한 사건을 준비해 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물론 도온이 이 가사에 ‘구출’(救出)이란 뜻의 RESCUE란 곡명으로 지어 1870년 그의 복음성가집(Songs of Devotion)에 발표하였습니다.
크로스비는 자신이 앞을 못 보는 것도 세상 것들의 장애를 받지 않고 하나님께 찬송하기 위함이기에 감사한다고 하면서 이 같은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크로스비는 미국 뉴욕 주 퍼터남 카운티(Putunam County)의 사우디스트(Southeast)에서 태어났는데, 갓난아기 때 감기 치료를 잘 못하여 맹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앞을 못 보기 때문에 공부도 늦었지만 어려서부터 음악과 시를 좋아해서 영감 있는 찬송을 많이 지었습니다. 맹인학교에서 교사로도 있었고, 같은 처지의 맹인 찬송작가인 루트(George F. Root)와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크로스비의 찬송이 23곡이나 수록되어 있는데,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43장),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46장), ‘언제 주님 오실는지’(163장), ‘너희 죄 흉악하나’(187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204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219장), ‘주가 맡긴 모든 역사’(231장), ‘저 죽어 가는 자’(275장), ‘후일에 생명 그칠 때’(295장), ‘예수께로 가면’(300장),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321장), ‘주께로 한 걸음씩’(323장), ‘인애하신 구세주여’(337장), ‘군기를 손에 높이 들고’(385장), ‘나의 생명 되신 주’(42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434장), ‘오 놀라운 구세주’(446장), ‘주 예수 넓은 품에’(476장), ‘기도하는 이 시간’(480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492장), ‘십자가로 가까이’(496장), ‘주의 십자가 있는데’(501장), ‘주와 같이 되기를’(508장) 등입니다.
병원응급실에서 위급한 환자에게 산소마스크를 입에 대어 살려내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3절에서는 “예수의 구원을 전파할 때에 그 크신 능력을 다 주시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2007. 01. 30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앤드류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의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1971년 초연한 이래, 삼십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브로드웨이에서 새롭게 리바이벌되어 세계 여러 곳에서 관심을 일으키며 공연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70년대부터 육완순 교수에 의해 발레로도 오랫동안 공연되었지요. 요즈음 국내 제작팀에 의해 2002년 브로드웨이 공연을 바탕으로 연출된 작품이 공연되고 있는데요, 인류구원을 지고 가는 운명 앞에서 갈등하는 예수와 예수의 운명적 역할의 매개체가 되는 유다의 모습을 상반되게 극적으로 나타낸 유명한 작품이지요. 저는 엊그제 이 공연을 보면서 예수님으로 인해 새사람이 된 막달라 마리아가 “I don''t know how to love him”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잊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이 여인처럼 내가 주님께 그렇게 고백한 적이 있는가? 나는 언제나 주님께 원하는 것만 달라고 조르기만 하지 않았나? “내 마음 나도 몰라, 내가 왜 이러는지. 변했죠. 달라졌죠. 그 분을 만난 뒤 나의 모습은 마치 딴 사람 같아. 나 어떻게 해야 하나? 흔들리는 나의 마음 (중략) 이 느낌 사랑이라고 말해야하나? 그가 내게 다가와서 사랑한다 말한다면 난 어떨까 가슴 떨려. 숨도 못 쉬고, 말도 못하고 도망갈 것 같아. 두렵지만 난 원해요 사랑해요.”
우리 찬송가 가운데에는 주님을 향하여 찬양과 경배, 영광을 드리는 내용은 많지만 이 마리아처럼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는 드물죠. 몇 장을 빼고는요.
찬송 시를 쓴 작가 가운데 병약한 분이 참 많은데, 이 찬송을 쓴 여류 시인 엘리자벳 프렌티스(Elizabeth Payson Prentiss, 1818-1878) 역시 평생 몸이 약해서 누워 지냈다고 합니다. 미국 포틀랜드(Portland) 출신인 그녀는 글 솜씨가 뛰어나 발표되는 시마다 문단의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펴낸 시집도 여러 권 되는데, ‘가정의 꽃’(The flower of the Family), ''천성을 향하여‘(Stepping Heavenward) 등이 그 대표작입니다.
매일 기도와 더불어 시를 쓰며 성결한 생활을 했던 그녀는 이런 기록도 남기고 있습니다. “나의 영혼으로부터 끊임없이 울려나오는 외침, 내가 가장 부족한 것은 그리스도를 더욱 더 사랑하는 일이다. 숲속에 있을 때나 침상에 있을 때나 차를 타고 갈 때나 행복하고 분주할 때나 슬프고 지루할 때나 나의 영혼은 더욱 사랑하라고 속삭인다.” 바로 이 찬송의 내용이기도 하지요. 그녀의 남편은 유니온 신학교의 목회학교수이며 장로교 목사인 죠지 프렌티스(George Lewis Prentiss)인데요, 결혼생활 11년째 되던 해에 무서운 전염병으로 두 자녀를 모두 잃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겠어요? 제 정신을 찾은 그녀는 주님의 위로를 받은 뒤 이런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님, 저는 한 때 세상의 기쁨만 구했습니다.
그 곳에서 평안과 쉼을 찾았나이다. 이제는 주님만 바라오니 가장 선한 것을 주시고, 바로 이것이 내 기도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선 이어 4절로 된 이 시를 지었는데, 18년이 지난 후인 1869년에야 그의 남편이 발견하고 감동을 받아 낱장으로 인쇄하여 돌려 읊었습니다. 우연히 이 시를 접한 유명한 복음찬송 작곡가인 도온(William Howard Doane, 1832-1915)은 이 아름다운 멜로디를 붙여 부흥집회를 통해 가는 곳마다 전파하여 널리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멜로디인 MORE LOVE TO THEE의 작곡자 도온은 위대한 찬송작곡가이죠? 미국 커네티커트주의 프레스턴(Preston)태생으로 우드스턱(Woodstock)에 있는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고,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 주님을 영접하여 노르윅(Norwick)의 침례교회 교인이 되었습니다. 가업을 이어 면화공장에서도 일하다가 제재 기계 상사에 입사하여 뛰어난 사업적인 수완으로 이 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받은바 음악적 재능을 살려 2백여 곡이 넘는 많은 찬송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는 데니슨(Dennison)대학에서 명예음악박사 학위도 받았습니다. 그의 곡은 주로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1820-1915)의 시에 붙인 것이 많은데요, 우리 찬송가에는 ‘슬픈 마음 있는 사람’(91장), ‘예수 나를 위하여’(144장), ‘언제 주님 다시 오실는지’(163장), ‘너희 죄 흉악하나’(187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219장), ‘주 예수 크신 사랑’(236장), ‘저 죽어가는 자 다 구원하고’(275장), ‘돌아와 돌아와’(315장), ‘주께로 한 걸음씩’(323장), ‘인애하신 구세주여’(337장), ‘예수 따라가며’(377장), ‘나의 생명 되신 주’(424장), ‘주 예수 넓은 품에’(476장), ‘기도하는 이 시간’(480장), ‘십자가로 가까이’(496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511장)등 16편이나 실려 있습니다.
이 찬송에서 가장 감동받는 장면은 마지막 3절이지요. 시인은 임종 때에도, 열린 하늘 문 앞에서 이 고백을 하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주님 때문에 너무 행복했었노라고 하면서... “오, 주여, 당신을 더욱 사랑합니다.”
2007. 01. 31
저 높고 푸른 하늘과
“여기 멋진 나무 한그루를 그릴 겁니다. 노랑 빛을 지닌 나무 잎도 여기에 그려 넣을까요? 브러시 옆면을 사용해서 풀밭을 그리세요. 브라운과 화이트를 섞은 하이라이트 색으로 바위 위에도 빛을 주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밴 다크 브라운을 쓸 건데요, 큰 바위를 몇 개 그려보죠.” 제가 즐겨 보는 TV 교육프로그램인 ‘밥 로스의 미술교실’ 중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하는 밥 로스(Bob Ross)의 대사입니다. 이젤에 걸쳐진 하얀 캔버스 위에 그가 붓을 댈 때마다 어쩌면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들이 척척 생겨날 수 있을까요? 나무가 생겨나고, 수풀이 자라고, 냇물이 흐르는가하면 멀리 산이 보이고, 구름이 떠가고... “옐로와 그린으로 사이사이에 덤불을 그려 주세요. 바위 위에 물이 튕기는 효과도 주어야겠지요?”하면 곧 생생하게 다른 모습들이 생겨납니다. 그리고선 이렇게 이야기 하지요. “캔버스 위에선 아무거나 할 수 있어요.”라고요. 그는 경치들을 붓끝으로 하나하나 어렵지 않게 그려냅니다. 저는 이 프로를 볼 때마다 감탄하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장면을 생각해보곤 하지요.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도 이렇게 쉽게 만들고, 뜯어 고치는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조물주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주관하심에 무슨 의심이 들겠나 하고요.
이 시를 지은 애디슨(Joseph Addison, 1672-1719)은 영국의 윌트셔(Wiltshire)주의 밀스턴(Milston)에서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사립 명문인 터하우스와 퀸스 대학을 거쳐 옥스퍼드의 막달렌 대학을 나왔는데, 어려서부터 라틴어로 시를 쓸 정도로 시작(詩作)에 뛰어났고, 그의 문체(文體)는 탁월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외교관을 거쳐 국무차관과 아일랜드의 서기장이 되는 등 정계활동도 하였습니다. 이 찬송 시는 ‘사람의 마음속에 신앙을 견고히 하는 방법에 대한 소론’이란 제목의 글을 그가 편집책임으로 있는 ‘목격자’(The Spectator)란 일간지에 실었는데, 바로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시편 19편을 재해석한 내용입니다. 그는 “초월적인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심으로 그 자신의 존재하심을 가장 잘 증거 하였다. 하늘과 땅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사의 소란함과 분주함을 떠나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증거들이다.”라고 하며 이 찬송을 지었습니다. 애디슨은 5편의 찬송시를 썼는데, 문학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우수한 것으로 후대 찬송가 작가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군요.
곡명 CREATION은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중 제1부 마지막곡인 13곡 합창 ‘저 하늘은 주 영광 나타내고’를 회중용 찬송으로 편곡한 것입니다. 오라토리오(Oratorio)란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제재에 의한 대규모의 서사적인 악곡을 말하는데, 독창과 합창, 관현악을 사용하는 극적인 음악이지요. 헨델의 ‘메시야’와 멘델스죤의 ‘엘리야’, 그리고 하이든의 ‘천지창조’를 일컬어 세계 3대 오라토리오라고들 합니다.
오스트리아의 로라우 태생인 하이든은 18C 후반의 빈 고전파 핵심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교향곡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죠. 104개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협주곡, 관현악곡, 오페라, 현악사중주곡을 비롯한 실내악곡, 독주곡, 가곡 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의 작품을 남겼는데요, 교회음악으로도 ‘천지창조’, ‘사계’(四季, Die Jahreszeiten),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 등 오라토리오와 14편의 미사, 테데움, ‘스타바트 마테르’,‘살베레지나’, 칸타타, 성가합창곡, 독창곡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많은 악성들 가운데서도 하이든은 가장 신앙적인 인물로 꼽힙니다. 그는 언제나 “나는 늘 하나님의 음악적인 재능을 맡고 있는 청지기에 불과하다”고 했고, 그가 작곡한 모든 곡, 즉 교회음악뿐만 아니라 세속음악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썼으며, 그 모두를 하나님께 바친다고 했습니다.
전체 세부분으로 되어있는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는 제1부와 제2부에서는 엿새 동안 이루신 창조의 일을 노래하고 있고, 3부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누리는 낙원에서의 행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찬송의 멜로디가 나오는 제13곡 합창도 창조 나흘째에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업적을 찬양하는 천사들의 합창입니다. 하이든의 합창곡 기법이 모든 곡에서 충분히 나타나 있고, 교회뿐만 아니라 일반 연주단체에서도 자주 연주되는 곡이기에 꼭 한번 들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찬송가에는 박자표도 4/4박자로, 빠르기도 ♩=116 이라고 되어있는데요, 원래의 합창곡에는 2/2로 되어 있어, 대체로 빠른 2박으로 연주합니다. ♩=116라는 것은 1분에 한 박을 116번 하라는 것인데, 이렇게 노래하면 상당히 지루한 느낌이 들지요. 마리너(Sir Neville Marriner)같은 지휘자는 ??=104정도로 빨리 연주합니다. 2분음표(??)가 104이니까 4분음표(♩)로 치자면 208이나 되지요. 회중들이 이렇게 빨리 부르기에는 지나치다 싶으니까, 4/4를 2/2로 바꾸어 ??=96 (♩=192)정도로 부르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07. 02. 09
눈을 들어 하늘보라
며칠 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대표회장 이 취임식이 있었습니다. 교계의 원로이신 목사님께서 한국교회는 물량주의, 영향력 상실, 성취감에 젖은 안주를 반성하고 경계해야한다는 내용의 설교를 하였습니다. 교인은 천만이 됐는데도 사회에 대한 영향력은 점점 약해지고, 심지어 교회가 사회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여 한국교회는 그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고 비판을 했지요. 정부의 관리나 국회의원 가운데도 많은 교인이 있고, 기업인들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있는데도 사회는 여전히 시끄럽고, 심지어 불미스러운 사건이 났다하면 그 중에 교인이 빠진 적이 없다고 하면서 “한국교회는 소금은 많은데 맛을 잃었고, 등잔은 많은데 불은 꺼지고 심지만 남았다”고 뼈아픈 자기 고백의 말씀을 한 것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 불 꺼진 심지! 믿는 자여 어이할고! 어이할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중략)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는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山上垂訓)중 팔복에 곧 이어지는 성도들의 사명에 대해 말씀한 것이지요. 소금의 중요한 용도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제일 중요한 역할이 부패를 방지하는 것과 음식의 맛을 돋우는 것 아니겠어요? 세상의 소금인 교인들이 세상 속에 녹아져 부패를 막고, 그로 인하여 살맛나는 세상이 되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소금되기가 쉽지는 않죠. 우선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녹아져야하니까요. 저부터 어딜 가나 튀어보고 싶고, 칭찬 받고 싶으니 말입니다.
이 찬송가를 쓴 석진영((1926-2005)여사는 문서전도 활동을 통하여 복음 전도자로서 활약한 여류 시인이입니다. 표기된 작사 년대가 1952년이니까 6.25 동란 중이지요. 그때 시인의 나이 26세로 울산에서 중학교 교사로 있을 당시인데요, 전쟁으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국가 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절망과 공포 속에 혼돈에 빠져있는 피난민들을 보면서 썼다고 합니다. 비록 고향을 떠나 피난살이를 하지만 그래도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일어나 각성하고 사명을 가져야 되지 않겠냐는 호소이자 외침인 것입니다. 석진영 여사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이나 루터교 성경학교와 라이프 성서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미국에서도 문서전도활동을 열심히 하였는데, LA에서 ‘하늘의 대사’(The Christian Ambassador)라는 간행물도 발행하고, 한인 교포사회에서 성경연구회도 주도하며 활동하였지요. ‘상우’(尙友), ‘일광’(一光), ‘창문을 열고’ 등 여러 권의 시집과 50여 편의 찬송시를 썼는데, 우리 찬송가에는 이 찬송 단 한 편만 실려 있습니다.
작곡자인 박재훈(朴在勳, 1922- )목사님은 평양 요한학교를 다니면서 음악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이 학교에서 이유선 님과 구두회 님을 만나게 되어 평생을 교회음악의 동역자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동경음악학교에서도 구두회 장로님과 함께 수학했고, 해방 후 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당시 학생들이 일본 군가만 부르는 것에 안타까워 많은 동요를 작곡했는데,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셔요’, ‘산골짝에 다람쥐’, ‘송이송이 눈꽃송이’ 등의 동요들이 모두 박 목사님의 작품입니다. 스무 살이 되던 때부터 찬송가를 작곡하기 시작해서 23세 때 ‘어서 돌아오오’를 작곡했지요. 이 곡은 30세 때인 1952년에 작곡했는데요, 평소 알고 지내던 석진영씨가 박 목사님에게 장문의 편지와 함께 이 시를 보내왔다고 회고합니다. “당시 부산은 여기저기서 몰려온 피란민들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석 선생은 이렇게 어지러울 때 성도들이 세상 가운데서 빛을 나타내고 탄식하는 이들에게 신앙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 역시 그 느낌대로 곡을 썼습니다.”라고요. 목사님은 그 후 미국 웨스트민스터 합창대학에서 공부하였고, 귀국하여 한양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며 영락교회 성가대지휘를 하였습니다. 박 목사님은 미국을 거쳐 1979년부터 캐나다에 살고 계십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서원대로 60세에 목사고시를 통과해 목사안수를 받고 토론토에서 큰빛장로교회를 개척하여 큰 교회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분의 작품으로는 찬송가와, 어린이찬송가, 성가합창곡, 독창곡 등 많은 곡들과 오페라 ‘에스더’와 칸타타 여러 곡이 있습니다. 우리찬송가에는 ‘눈을 들어 하늘보라’(256장), ‘어서 돌아오오’(317장), ‘산마다 불이 탄다’(31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460장) 등 4장이 실려 있습니다.
이 찬송엔 대책 없는 질문만 있고 대답이 없다고 평하는 분이 더러 있습니다만, 이미 마음속에 소금과 빛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기대하며 남겨놓은 여운은 아닐까요?
2007. 02. 23
내 맘이 낙심되며
김정국(金正國)이란 선비가 있었습니다. 잘나가는 벼슬을 지내다 1519년 기묘사화로 정계에서 쫓겨나 시골로 낙향을 했는데요, 그는 스스로 ‘팔여거사’(八餘居士)라 불렀지요. ‘팔여’는 여덟 가지가 넉넉하다는 뜻인데요, 서른네 살 창창한 나이에 녹봉도 끊겨 가난하게 지냈지만 그는 항상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토란국과 보리밥을 넉넉하게 먹고, 따뜻한 온돌에서 잠을 넉넉하게 자고, 맑은 샘물을 넉넉하게 마시고,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하게 보고, 봄꽃과 가을 달빛을 넉넉하게 감상하고, 새와 솔바람 소리를 넉넉하게 듣고,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향기를 넉넉하게 맡는다네.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를 넉넉하게 즐기기에 ‘팔여’라 했네.”라는 김정국의 말에 ‘팔부족’(八不足)으로 그의 친구가 화답을 했다지요.
“세상에는 자네와 반대로 사는 사람도 있더군.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고도 부족하고, 휘황한 난간에 비단병풍을 치고 잠을 자면서도 부족하고, 이름난 술을 실컷 마시고도 부족하고, 울긋불긋한 그림을 실컷 보고도 부족하고, 아리따운 기생과 실컷 놀고도 부족하고, 좋은 음악 다 듣고도 부족하고, 희귀한 향을 맡고도 부족하다 여기지.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 부족한 게 있다고 부족함을 걱정하더군.”
“그 은혜가 내게 족하네. 이 괴로운 세상 지날 때 그 은혜가 족하네.”
이 찬송을 부를 때면 제 머리에선 “족(足)하네”만 계속 맴돕니다. 엘리야가 자신을 죽이려는 아합과 이세벨에게 쫓겨 광야에로 들어가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죽기를 바라고 주님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왕상 19; 4)고 외친 말씀이지요. 멘델스죤이 작곡한 오라토리오 ‘엘리야’ 제2부에서 엘리야 역인 바리톤 아리아 ‘족 합니다’(Es ist genug)가 바로 이 장면을 노래한 것인데, 멘델스죤은 이 오라토리오를 독일어와 영어로 동시에 작곡을 했고, 이 아리아의 영어 제목은 ‘It is enough’입니다.
또 “족 하네”에 생각나는 또 한분이 있지요. 바울입니다. 그가 주님께 세 번씩이나 육체에 가시를 없이해 달라고 간구했을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에서 완전하게 된다.”(고후 12;9)는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까? 성경학자들은 바울의 가시가 그에게 자주 발병한 두통, 안질, 말라리아 혹은 간질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데요, 그 가시는 능력 있는 바울의 기도를 통해서도 제어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겸손하게 하시려고 그러시나보다 이해하며,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르게 하려고 더욱 더 기쁜 마음으로 그 약점들을 자랑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12;10)라고 고백했지요.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함께한다는 사실이 고통에서 자유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 찬송은 네로 황제의 박해로 로마에서 두 번째 투옥된 바울이 외롭고 추운 감옥에서 그의 젊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쓴 편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처음 변론할 때에, 나에 편에 서서 나를 도와준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모두 나를 버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허물이 돌아가지 않기를 빕니다. 주께서 내 곁에 계서서,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나를 통하여 전도의 말씀이 완전히 전파되게 하시고, 모든 이방사람이 그것을 들을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구원하셔서, 그분의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딤후 4;16-18) 이렇듯, 엘리야나 바울 모두의 고백이 극한 역경 가운데서 일구어진 열매라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국 태생의 에반스(J.Bruce Evans)가 작사 작곡한 이 찬송의 원 제목은 HIS GRACE IS ENOUGH입니다. 에반스는 웨일즈 출신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음악박사 학위를 받은 20C 사람으로만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찬송을 부르노라면 즉시즉시 응답이 이루어지는 느낌이 들곤 하지요. 첫째 단(1-4마디), 셋째 단(9-12마디)은 ‘낙심’, ‘근심’, ‘괴로움’, 절망, 두려움, ‘번민’, ‘눈물’, ‘환난’, ‘슬픔’ 등 절망적인 가사에 비해, 둘째 단(5-8마디), 넷째 단(13-16마디)은 주께서 오셔서 위로해 주시고, 짐을 져주시고, 속삭여 주시고, ‘새 희망’과 ‘용기’를 주시며 ‘주님의 능력’을 주시는 소망의 가사로, 명암이 극명하게 나타나지요. 그리하여 드디어 후렴에서 옛 바울의 고백이 터져 나오지 않습니까? 그동안 경험했던 시련들이 이제는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죠. 낙심과 근심, 번민, 환난 등이 말입니다.
또 “그 은혜가 내게 족 하네”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는 것이라든지, 반음계적인 진행 등이 즐거움의 표현으로 보이며, ‘족 하네’와 ‘지날 때’의 조약 상행과 두개의 늘임표가 넉넉함의 자랑과 기쁨을 표출하는 클라이맥스입니다.
2007. 02. 26
주님의 귀한 말씀은
성경을 영어로 바이블(Bible)이라 하지 않습니까? 이 말은 비블로스(Biblos)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는데, 이집트에서 생산된 파피루스가 페니키아의 항구인 비블로스를 통해 여러 나라로 수출된 데서 그 이름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종이가 없던 고대시대의 글은 대부분 파피루스에 손으로 기록되었듯이 성경도 처음에는 대부분 파피루스와 짐승의 가죽을 부드럽게 하여 만든 양피지(羊皮紙)에 기록했지요. 파피루스 20장 이상을 붙여 4m정도의 두루마리를 만들고 끝에 나무봉을 부착해서 사용했습니다. 파피루스는 나일 강 하류에서 자라는 갈대이름인데, 또한 갈대로 만든 종이를 가리키기도 하지요. 이 파피루스는 BC 4천년 말 이래 종이를 사용하기 전까지 필사도구로 사용되었지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는 BC 17C부터 쓰기 시작했는데요, 양피지는 파피루스나 초기의 종이에 비해 튼튼하고 오래 보존할 수 있는 반면에 값이 비싸게 들고 부피가 크고 무겁다고 합니다. 보통 파피루스 한 장에는 단어를 140자 가량 쓸 수 있다고 하는데요, 만일 로마서 한 권을 필사한다면 파피루스 종이 50장이 들고, 쓰는 데만 100시간 이상 들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인쇄술이 발달하여 서경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이런 과정을 알고 보면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 성경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습니다. 귀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를 면면이 이어오면서 믿음으로 살아온 선조들의 열성과 노력을 거쳐 우리 손에 까지 들려있는 것을 보면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찬송을 지은 바튼(Bernard Barton, 1784-1849)은 영국 런던 태생으로 철저한 퀘이커(Quaker)교도였습니다. 퀘이커교는 교회의 직제나 의식을 거부하고, 평화주의, 검소한 생활, 구제를 원칙으로 하는 교파이지요. 명상을 원칙으로 하고, 교역자 없이 누구나 성령의 감동대로 설교하고 간증하는 예배로 유명하지요. 바튼은 어려서부터 퀘이커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청년시절엔 가게 점원도하고, 장사도하다가 우드브리지(Woodbrige)에서 은행원으로 40년간 일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퀘이커 교도들은 원래 찬송을 부르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바튼은 많은 찬송을 지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딸이 시와 수필 등의 유작들을 모아 세상에 내 놓았습니다. 8권의 운율시(Metrical Effusions)가 그것인데, 이 시들 가운데서 20편이 뽑혀 찬송가로 사용되고 있고, 주로 스코틀랜드 연합교회찬송가(Scottish Evangelical Union Hymnal)에 실려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찬송은 운율시집 중에 ‘성골함’(聖骨函, The Reliquary)에 수록된 11절이나 되는 시입니다. 우리 찬송에는 여기에서 1절, 2절, 9절, 11절만 발췌되어 있는데, 번역된 우리 말 가사로는 영시(英詩)의 아름다움을 느껴볼 수는 없지만 원래의 시는 영문학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Lamp of our feet, whereby we trace. Our path when wont to stray, Stream from the fount of heavenly grace, Brook by the traveler''''s way.”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는 말씀을 배경으로 쓴 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로 인해 어두움 속을 헤매는 인간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빛이죠. 그런데 영적으로 소경인 사람들은 이 빛을 눈으로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깨닫지도 못합니다. 이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이 밝은 빛을 따라 어두움 속의 세상을 향해 가는 자가 바로 우리 성도이고요. 어두움에 ‘빛’, 목마른 사막 길에 ‘샘물’, 굶는 이에게 ‘만나’, 갈 길을 잃은 이에게 ‘불기둥’과 ‘구름기둥’... 이렇게 여기에서 시인은 말씀의 역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우리 삶에 있어서 실제적인 인도자이시며 고난 중에서 구출해 내는 구원자이신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말씀을 잊을 수 없고, 말씀을 준행하려는 노력에 전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래서 4절에서 “지혜를 깨닫게 하시고”, “밝히 알도록” 도와달라고 간구합니다. 참고로,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절로 되어있는 장이지요. 무려 176절로 되어있으니까요. 각 연에 8절씩 22연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22연의 머리글자가 알파벳으로 시작되는 답관체(踏冠體)의 형식인데, 이 본문인 105절은 14연인 ‘눈’(?, Nun)으로 시작됩니다.
이 찬송은 독일의 레겐(Regen)태생인 슐데스(Wilhelm August Ferdinand Schlthes, 1816-1879)가 작곡했습니다. 스페인계 독일인인 그는 독일에서 공부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브람톤 기도원(Brampton Oratory)의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많은 찬송가를 정통기법에 의해 작곡하여 발표했고, 여러 음악학교를 순회하면서 발성과 음악이론을 강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웅변과 음성학의 권위자로서 목회자들을 위하여 호흡과 음의 높낮이 등 설교의 훈련이 절실하다고 여겨 그를 위한 교육도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곡명이 LAMBETH라고 되어있지요? 람베트는 영국 근교 테임스 강변에 위치한 지명인데요, 왜 찬송곡명이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2007. 03. 09
예수 나를 위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최초의 찬송가는 무엇일까요? 개화기에 양악의 선구자였고, 1931년에 나온 ‘신정찬송가’ 편집위원이었던 김인식(金仁湜, 1885-1962)선생이 작사한 바로 이 찬송, ‘예수 나를 위하여’입니다. 좌측 상단에 1905년이라고 작곡 년대가 표시되어있는데요, 이 찬송이 최초로 수록된 초기 장로교 찬송가인 ‘찬셩시’가 출판된 해입니다. 1905년이라면 우리나라 역사상 매우 중요한 해이지요.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민족의 비통이 사무치던 때 아닙니까? 온 겨레가 나라를 잃은 슬픔에 휩싸였던 어려운 때였지요. 백성들의 기상은 땅에 떨어지고, 못내 너무나 분하고 억울하여 방방곡곡에 몰려다니며 울부짖어 아우성거리고, 나라의 앞날이 막막하여 비탄에 젖어있던 그야말로 처참했던 때입니다.
이 때, 나라를 잃은 슬픔에 자결한 사람도 줄을 이었다고 하는데요, 충정 공 민영환(閔泳煥)은 그가 자결할 때 남긴 ‘고국민서(告國民書)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고 합니다. “결코 실망하지 마십시오.”(小勿失望) “한국의 장래 그 희망은 예수의 종교밖에는 없습니다.”라고요. 정말로 슬픈 이 백성을 위로할 이는 주님 밖에 없었던 것이죠.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던 이때가 기독교가 성장하는 엄청난 기회였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합니다. 희망을 잃은 이 백성에게 참 빛, 참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위로가 될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죠.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성장이 1905년에서부터 기적적으로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고 하는데요, 1905년에서 1906년 사이에 완전히 배가(倍加)가 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1905년 교회 참석자가 6,500여명인데 비해, 1906년에는 12,000명이나 되었으니까요. 이런 와중에서 당시 20세 청년인 김인식이 이 찬송을 짓게 된 것이죠. 시대가 시대인 만큼 당시에 이 찬송은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김인식 선생은 평남 강서 출신으로 평양 숭덕(崇德)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음악을 배우게 되었는데요, 선교사인 헌트 부인(Mrs.W.B.Hunt)과 스누크 양(Miss.V.L.Snook)에게서 음악이론과 성악을 배우고, 오르간과 바이올린까지 배웠다고 합니다. 숭실(崇實)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 상동(尙洞)청년학원 중학부에서 음악교사가 되었는데요, 그 때까지 어느 학교에도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가 없었으니까 그야말로 최초의 음악교사가 된 것이죠. 그 뒤에는 지금의 중앙고등학교인 기호(畿湖)학교와 진명, 오성(五星), 경신, 배재 등의 학교에서도 음악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YMCA 안에 합창단을 조직해서 활발히 연주활동도 하고, 종교(宗橋)교회에선 찬양대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헨델의 ‘메시야’를 비롯해서 수많은 합창곡을 번역하여 연주를 했고, 많은 찬송가를 번역 하였습니다. 그는 국악에도 관심을 보여 영산회상(靈山會像), 여민락(與民樂), 가곡채보(歌曲採譜) 등 우리나라 전통음악을 서양악보화 하는데도 힘썼고요, ‘애국가’, ‘전진가’, ‘국기가’ 등 여러 곡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곡조인 NEAR THE CROSS는 미국의 유명한 복음성가 작곡가인 도온(William Howard Doane, 1832-1915)이 작곡한 것인데요, 이 곡도 역시 주님의 고난을 노래한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의 찬송가인 ‘십자가로 가까이’(496장)에 붙인 곡이기 때문에 그 찬송가사에서 따라온 제목이지요. 찬송의 내용도 비슷하여 한동안 이 찬송도 크로스비의 작사로 표기되기도 했습니다.
도온은 미국 커네티커트주의 프레스턴(Preston)에서 태어나 우드스턱(Woodstock)에서 교육을 받았고, 청소년 시절에 예수를 믿어 노르윅(Norwick)의 침례교회 교인이 되었습니다. 사업을 하면서도 200여곡이 넘는 찬송을 작곡하였는데요, 그의 곡의 대부분은 크로스비의 시에 붙인 것입니다. 그는 데니슨(Dennison)대학에서 명예음악박사 학위도 받았지요. 도온이 작곡한 찬송은 우리 찬송가에 많이 수록되어 있어요. ‘슬픈 마음 있는 사람’(91장), ‘예수 나를 위하여’(144장), ‘언제 주님 다시 오실는지’(163장), ‘너희 죄 흉악하나’(187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219장), ‘주 예수 크신 사랑’(236장), ‘저 죽어가는 자 다 구원하고’(275장), ‘돌아와 돌아와’(315장), ‘주께로 한 걸음씩’(323장), ‘인애하신 구세주여’(337장), ‘예수 따라가며’(377장), ‘나의 생명 되신 주’(424장), ‘주 예수 넓은 품에’(476장), ‘기도하는 이 시간’(480장), ‘십자가로 가까이’(496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511장)등 16편이 그것입니다.
이 찬송은 지어진지 이미 100년이 넘었는데도 그 원문이 한 글자도 수정되지 않은 채 원작 그대로 불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찬송을 애창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우선, 7음계이긴 합니다만, 음계로 보나 박자로 보나 다분히 국악적이고요, 선율 진행이 통곡하는 것 같지요. 특히 후렴에서 “예수여, 예수여”하는 후렴 부분에서 비록 노래는 하고 있지만, 울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너무도 한(恨)이 많은 민족 아닙니까?
2007. 03. 23
예수 사랑하심은
2002년 9월, 제가 새문안교회 예본성가대를 지휘할 적에 새문안교회 창립 115주년 음악예배를 기획했던 일이 있습니다. 1887년에 언더우드 목사가 창립한 이 교회를 우리나라의 어머니교회라고 일컫지 않습니까? “새문안 그리고 복음과 찬송의 역사”란 제목으로 다큐멘터리 형태로 꾸몄었지요. 예배를 시작하면서 본당의 전등을 모두 꺼서 캄캄하게 한 후에 본당 로비로부터 흰 성의를 입은 소년이 강대로 향하여 촛불을 들고 나갑니다. 그 때에 음성이 들려오지요. 바로 언더우드 선교사가 1890년대에 쓴 기도문입니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혔습니다. (중략)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하고 화부터 냅니다. (중략)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佯鬼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그 때에 어린이성가대가 찌그덕 거리는 풍금소리에 맞춰 “예수 사랑하심은”을 부르면서 제단이 점점 밝아오게 하는 연출을 하였는데요, 모인 회중들이 감격했던 밤이었습니다.
이 찬송가는 옛날부터 어린이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지요. 이 찬송을 작사한 분은 찬송가에는 안나 워너(Anna Bartlett Warner, 1824-1915)라고 쓰여 있지만, 사실은 안나보다 네 살 위인 수잔 워너(Susan Bartlett Warner)와의 합작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자매는 미국 뉴욕 주의 롱아일랜드 태생으로 변호사의 딸로 태어났는데요, 어려서부터 글 쓰는데 뛰어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해요. 재미있는 것은 이 자매가 합작으로 소설을 써서 큰 인기를 끌었지요. 이들 자매가 쓴 소설은 ‘넓고 넓은 세상’(The wide wide world), ‘말과 표적’(Say and Seal)등인데요, 수잔이 웨더렐(Elizabeth Wetherell), 안나가 로드럽(Amy Lothrop)이란 예명으로 발표한 이 장편소설들은 수백만 부가 팔려나가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당시에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훨씬 능가할 만큼 대인기를 누렸다고 합니다.
이 찬송가는 1860년에 쓴 바로 그 소설 ‘말과 표적’에 나오는데요, 이 소설에는 주인공인 데릭이라는 소년과 함께 이 소년을 사랑하는 린든이라는 주일학교 교사와 병약한 팩스라는 소년이 나옵니다. 이 소설의 내용 중에 팩스 어린이가 병상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자기를 극진히 돌보는 린든 선생님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지요. 그 때에 그는 사랑하는 주일학교 제자 어린이 앞에서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줍니다. 어린 팩스는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하는 노래를 조용히 들으며 평안하게 숨을 거두게 되는데, 바로 그 장면에서 나온 것이죠. 소설가인 워너는 후에 육군사관학교(West Point) 생도를 위한 주일학교를 운영하며 헌신했습니다.
곡명인 CHINA는 중국이란 뜻이지 않습니까? 이 곡명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이 찬송이 중국 어린이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고 선교보고를 했던 모양입니다. 이를 기억한 미국 침례교 찬송가위원회에서 찬송가(Baptist Hymnal, 1956)를 편찬하면서 그렇게 붙였는데, 우리 선교사들도 그렇게 보고했었더라면 KOREA로 붙였을 지도 모르죠. 이 곡조는 미국의 유명한 주일학교 찬송작가인 브래드버리(William B. Bradbury, 1816-1868)가 1861년에 이 소설을 읽다가 영감을 얻어 작곡을 했습니다. 물론 곡명은 CHINA가 아니고, JESUS LOVES ME 이었고요. 찬송가에는 1862년으로 밝히고 있는데, 이는 ‘황금 소낙비’(Golden Shower)에 이 곡을 처음 발표했던 해입니다.
브래드버리는 미국 태생으로 ‘내 주를 가까이’를 작곡한 메이슨(Lowell Mason)과 함께 음악공부를 했고, 오르간 연주자로, 음악 교사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영국과 독일에 유학을 한 후에 성악학교와 음악학교를 세우기도 했고, 많은 작곡활동을 했지요. 수십 권의 가곡집과 성가집도 출판했고, 그의 형과 합작 투자하여 ‘브래드버리’란 피아노사도 창업을 했습니다. 그가 작곡한 찬송가는 우리 찬송가에 여러 편 수록되어 있는데, ‘주여 우리 무리를’(47장), ‘천지에 있는 이름 중’(101장), ‘감람산 깊은 밤중에’(134장), ‘큰 죄에 빠진 날 위해’(339장), ‘예수 사랑하심은’(411장),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442장), ‘예수가 거느리시니’(444장), ‘나 어느 곳에 있든지’(466장), ‘주여 복을 주시기를’(481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482장), ‘이 몸의 소망 무엔가’(539장) 등 11곡이나 됩니다.
“Jesus loves me”로 시작되는 이 찬송은 “Jesus loves me”란 말이 일곱 번이나 등장하고, 특히 후렴에서 “Yes, Jesus loves me!”를 세 번 연거푸 외침으로 큰 감동을 자아내지요.